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하노이 시내의 풍경.
완전 시내 중심가는 아니어서인지 노후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비에 젖은 모습이 왠지 홍콩 영화에서나 보던 골목 분위기입니다.
베트남에서 가장 큰 도시는 호치민 시지만, 공식적인 수도는 하노이입니다. 아무리 수도라고 해도 못 사는 구역은 있기 마련이네요.
베트남에 왔으니 하루의 시작은 베트남식 쌀국수, "포"를 먹는 것부터.
바로 옆 나라인 캄보디아의 쌀국수와 그렇게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한국에서 먹던 베트남식 쌀국수의 원조를 먹는다는 기분에 감회가 새롭습니다.
다른 일행들은 대부분 잘 못 먹는 고수도 듬뿍 넣어서 한 그릇 뚝딱. 원래 아침에 일어나면 식욕이 없어서 아침식사는 잘 안하게 되는데, 쌀국수는 부담도 되지 않고 식욕을 돋구는 냄새가 나서인지 계속 먹게 되네요.
하노이에는 베트남의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호치민의 묘가 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독립시킨 주역이며, 쉽게 부패하는 대다수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검소하고 인자한 성품으로 아직까지도 존경받는 위인입니다.
본인은 유언에 남기길 자신을 화장해서 그 재를 베트남 전역에 고루 뿌려달라고 했는데, 결국엔 시체가 방부처리되어서 기념관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공산주의 국가 지도자들은 다들 박제가 되는 게 운명인가 봅니다. 레닌도 그렇고, 모택동도 그렇고, 북쪽의 김일성도 그렇고...
국빈 초청시 숙소로 사용되는 영빈관입니다. 원래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 총독 관저로 사용되던 건물인데 베트남 독립 후 정부 소유가 되었습니다. 독립 직후 사람들이 국가 주석으로 취임한 호치민에게 거처로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딸린 가족도 없는 자신에게 이런 으리으리한 건물은 필요없다며 총독관저 수리공이 살던 오두막에서 생활한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월남전에서 미국을 상대로도 끝까지 버텨낸 거나, 죽을때까지 부정부패가 없었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뛰어난 위인이었죠. 문제는 그 사람이 지지한 체제가 공산주의였다는 거지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다행이기도 합니다. 만약 호치민이 자본주의 지지자였다면 베트남은 지금쯤 한국보다 훨씬 잘 나가며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의 제품 수출에 엄청난 걸림돌이 되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기둥이 하나밖에 없는 사찰로 유명한 일주사. 줄기가 하나인 연잎에서 그 모양을 따왔다고 합니다.
옛날, 아이가 없어 고민이던 왕이 꿈 속에서 아이를 안고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본 후 왕자를 갖게 되어 그 보답으로 지은 절입니다.
아이를 점지해주는 효험이 있는 관광명소이며, 베트남 지폐에 찍혀 있을 정도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유적지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문묘. 공자의 위폐를 모시기 위해 지은 사당 겸 유학자 양성소입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성균관 쯤 되는 곳이지요.
좌우의 문들은 일반인들이 지나다니고 가운데 큰 문은 왕만이 지나갈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다들 왕이 된 것처럼 가운데 문을 통해 들어갑니다.
들어가면 좌우로 비석을 짊어진 돌거북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사제명비라고 하는 이 비석에는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이름을 새겨놓았습니다. 자세히 보면 거북이의 머리만 유독 까맣게 손때가 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거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 시험에 합격한다고 해서 수험생들이 단체로 몰려와 다들 한번씩 만지고 가기 때문입니다.
문묘 내부의 공자상. 중국에서도 안 모시던 공자님 제사를 꾸준히 모시던 나라가 둘 있었으니, 바로 조선과 베트남입니다. 정작 중국에서는 문화대혁명이다 뭐다 하면서 유교를 적대시 하는 바람에 지금은 유학 관련자료를 찾으러 한국에 올 정도라고 하는데 말이죠.
왠지 이렇게 보니 공자라기보다는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범상치 않은 손 모양하며, 외계인 세뇌광선처럼 보이는 돌돌말린 향이라던가...
곳곳에는 이렇게 분재가 심어져 있습니다. 어떤 분재는 토피어리마냥 잘라서 학 모양을 만들어 놓기도 했는데, 그냥 이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이 훨씬 더 나은 듯.
건물 내부에서는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문묘제례악 아닌가 싶은데, 또 막상 악기의 면면을 보자면 8종의 아악기와는 별 관련이 없어보여서 확신을 하기가 힘드네요.
어쩌면 베트남 전통 음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베트남 버전의 문묘제례악일 수도 있고...
문묘에 모셔진 또 하나의 성인은 쭈반안. 베트남의 유학자로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며 유학 부흥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태자의 스승을 지낼 정도로 학식이 깊은 위인이었습니다.
유학자가 뭐 그리 대단한건가 싶다가도 우리나라 지폐에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 도산서원이 찍혀나오는 걸 생각하면 유교 국가의 여파란게 참 무섭구나 싶습니다.
하노이를 벗어나 하롱베이로 가는 길. 도로에는 오토바이가 가득합니다.
중국은 자전거, 베트남은 오토바이라더니 세계에서 네번째로 큰 오토바이 시장 답습니다. 한 손에 짐을 가득 들고 오토바이를 모는 사람이나, 오토바이 한 대에 네다섯명이 타고 가는 진풍경도 종종 보이곤 합니다.
듣기로는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큰 오토바이 시장이 베트남이라던데, 낙후된 교통 인프라와 미흡한 대중교통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자동차를 살 형편은 안되니 다들 스쿠터를 타고 다니는 거지요.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흔적이 셋 있는데, 하나는 아침마다 길거리 리어카에서도 파는 바게트 빵이고, 다른 하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노천카페입니다.
베트남은 의외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커피 생산국인데, 로부스타라고 불리는 품종의 커피를 주로 생산합니다. 아라비카 품종의 원두에 비하면 아무래도 저급품 취급을 받는지라 고급화 전략을 추구하는 카페에서는 '우리는 베트남산 로부스타를 쓰지 않습니다'라고 광고하던 적도 있었죠. 그래도 고급 로부스타를 잘 볶으면 나름 맛있는 커피가 나오긴 합니다만.
그런데 베트남에서는 원두커피를 그대로 먹기보다는 잔에 연유를 듬뿍 넣고 커피핀이라는 독특한 여과기에 한 번 거른 커피를 타서 마시는 게 일반적입니다. 딱 우리나라 믹스커피 맛이 나더군요.
바게트와 노천카페에 이어 식민지 흔적을 보여주는 또 한가지 풍경, 창문도 없고 페인트칠도 하지 않은 건물 옆면입니다.
프랑스 총독부에서 세금을 걷어들이기 위해 내놓았던 정책 중 하나가 건물 너비만큼 돈을 걷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마냥 폭이 좁은 집들이 탄생했습니다. 건물간의 간격이 없다보니 옆집과 벽을 공유하게 되고, 건축주 입장에서는 어차피 옆집에 누군가가 이사 와서 건물 올리면 가려질 벽이니 창문도 안 내고 페인트칠도 안 하는게 당연시 된 거죠.
이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만인은 평등하다'는 이념 아래 사람들에게 똑같은 너비의 주택부지를 할당하면서, 오늘날에도 저렇게 옆면에 시멘트를 드러낸 건물들이 늘어서도록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달리는 버스 안에서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새 해는 지고, 목적지인 하롱베이의 호텔이 도착하게 됩니다. 2천여개에 달하는 섬들이 만들어내는 하롱베이의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하며 잠자리에 듭니다.
'여행하기:Travel > 베트남:Vietnam'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베트남]하롱베이, 여의주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섬들 (3) | 2016.02.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