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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프랑스:France

[프랑스]천국의 섬, 타히티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이스터 섬.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외딴 섬 답게 한국에서 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건 여행을 가던 일본에서 이스터섬을 가는 관광객 수가 엄청나게 많은지라 일본 경유로 타히티를 거쳐 이스터섬을 가는 방법이 있다는 거지요.

만약 이 경로가 없었으면 한국에서 미국까지 간 다음, 미국에서 칠레로 가고, 칠레에서 다시 이스터섬으로 삥 돌아서 가는 방법 뿐입니다. 미국과 중남미 세계일주라면 모를까, 이스터섬 구경이 핵심인 제게는 별로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는 여정이지요. 일본과 타히티를 경유하는 편이 비행 시간도 그렇고 요금도 그렇고 훨씬 경제적입니다.

그래서 일단 일본으로 간 후, 타히티로 가는 에어 타히티누이 항공편을 탔습니다. 비행기 티켓 구입할 때만 해도 타히티는 그냥 이스터섬 가는 길에 그냥 잠시 들러보는 휴양지 정도로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 측면에서 그냥 1박2일만 배정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타히티를 가 보니 이건 그야말로 천국... 좀 무리를 해서라도 2~3일 정도는 더 지냈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가 마구 밀려오더군요.

 

오랜 비행을 마치고 타히티 섬의 파페테 공항에 도착합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공항 내리는 순간부터 뭔가 공기가 다른 느낌. 

좁은 비행기 안에서 시간을 보내느라 지친 관광객들을 위해 원주민 악사들이 음악을 연주하며 환영하고 꽃을 꽂아줍니다.


환영의 인사로 받은 것은 티아레라고 불리는 하얀 꽃인데, 조그만 꽃 한송이에서 나는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고 좋은 향기가 납니다. 타히티의 상징과도 같은 꽃으로, 서머셋 몸의 소설에서도 이 꽃의 향기에 대한 서술이 나왔지요.

"티아레, 이것은 이 섬에 피는 하얀 꽃의 이름인데, 말할 수 없이 향기가 그윽하다. 그래서 그 향기를 한 번 맡기만 하면 아무리 멀고 먼 나라를 헤매다가도 언젠가는 타히티 섬에 이끌려서 되돌아오게 된다는 전설이 있다. 그녀의 이름은 그녀의 아버지가 이 꽃의 이름을 그대로 따라 딸에게 지어준 것이었다. 그녀 역시 스트리클랜드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서머셋 몸, "달과 6펜스" 중에서 


사실 타히티의 정식 명칭은 프렌치 폴리네시아입니다.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프렌치 폴리네시아에서 가장 크고 잘 개발된 섬이 타히티라서 다들 타히티라고 부르지만, 모레아나 보라보라 등 다른 섬들도 아름답기로 유명합니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그래도 바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다른 섬으로 한 번 가봐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배를 타고 모레아 섬으로 이동합니다. 보라보라는 타히티에서 좀 더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비행기를 타야만 갈 수 있더군요.

타히티 부두에서 보면 손에 잡힐듯이 보이는 게 모레아인지라 배를 타고 30~40분 정도만 항해하면 도착합니다. 그런데 쾌속선이라 그런지 파도가 없는 잔잔한 바다 위를 항해하는데도 울렁거림이 심해서 멀미하는 사람이 꽤나 나오네요. 


버스를 타고 숙소로 이동하니 어느 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습니다.

난생 처음 본 야자나무와 남태평양의 바다가 멋지네요. 


남태평양의 일몰 풍경.

산호초가 파도를 막아주는 덕에 물결이 잔잔한 게 바다가 아니라 호수라고 해도 믿을 정도입니다.


배도 고프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가 본 국기.

프렌치 폴리네시아는 프랑스령의 섬이라서 프랑스 국기와 프렌치 폴리네시아 깃발이 함께 걸려 있습니다. 미국령 괌과 비슷하달까요.

해외 영토이긴 한데 나름 독자적으로 굴러가는 곳이라서 본국과의 관계가 어떤 건지 참 애매한 느낌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제가 여행할 때만 해도 본국에서는 유로화를 쓰는데 타히티는 여전히 프렌치퍼시픽 프랑을 쓰고 있었으니까요.

프랑스에서 핵실험을 할 때 주구장창 이 동네 산호초 섬에서 해대는 바람에 '아예 독립을 해버리자'는 움직임도 있구요.


저녁은 간단하게 먹고, 기념품도 이것저것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옵니다.

밤인데도 기온이 그닥 떨어지지 않고, 방 안은 후덥지근해서 산책도 할 겸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까는 해가 떨어지던 자리에 지금은 달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네요.


다음 날, 날이 밝은 후에 본 숙소.

타히티는 돈 좀 있는 유럽사람들 휴양지나 신혼여행지로 유명한 곳이라 곳곳에 고급 호텔과 리조트들이 즐비합니다. 하지만 그 가격도 무시무시하죠. 

다행히 인터넷에서 배낭여행객을 대상으로 하는 저렴한 숙소를 예약했는데, 냉방도 안되고 화장실과 샤워시설은 공용이고...-_-;

원래 다른 건 몰라도 잠은 편하게 자야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지만, 타히티의 물가는 상상을 초월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묵었습니다.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도 후회가 되지 않는 건, 숙소 바로 앞에 이렇게 멋진 바다가 있기 때문이죠.

오래된 숙박시설일수록 시설은 별로라도 바다가 좋다더니, 문 열고 몇 걸음만 걸으면 이렇게 바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수상리조트 부럽지 않네요.

게다가 깊이도 깊지 않고 산호가 띄엄띄엄 있어서 걸어다니며 물고기 구경하기도 좋습니다.


얕은 바다에는 조그만 치어들이 헤엄치며 놀고 있습니다.

무슨 바닷물이 1급수 강물처럼 맑아서 고기들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는 바닷가입니다.


집에서 가져온 물안경과 스노클을 끼고 본격적으로 바다로 들어갑니다.

물이 따뜻한데다 파도가 전혀 없어서 워터파크 놀러 온 기분.

카메라에 수중촬영용 케이스를 끼워서 사진을 찍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습기가 자꾸 차면서 사진이 좀 뿌옇게 찍힙니다.


산호초를 배경으로 각양각색의 물고기들이 주변을 헤엄쳐 다닙니다.

어딜 가도 물이 허리에서 가슴 사이까지만 올라오는데다가 물살도 거의 없으니 바다에서 수영하는 게 아니라 무슨 큰 수족관 어항을 산책하는 느낌입니다.


팔을 저으며 슬슬 걸어다니다가 고개만 숙이면, 혹은 다리만 좀 구부리면 물고기들이 떼지어 헤엄쳐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자 부스러기나 빵 조각이라도 좀 던져주면 신나게 먹어치웁니다.


물고기 밥만 주다가 막상 내가 굶으면 안되지 싶어서 주변의 레스토랑에 들어갔습니다.

아무리 물가 비싼 타히티지만 그래도 한 끼 정도는 제대로 먹어줘야지 싶어서 찾아간 로컬 레스토랑.

3코스 메뉴의 시작은 참치 까르파쵸. 생선이 싱싱해서 그런지 굉장히 맛있습니다.


메인은 랍스터 소스를 곁들인 마히마히 물고기 요리. 밥과 와사비가 함께 나오는 게 특이하네요.

예전에는 유럽 관광객들이 주 고객이었는데, 지금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씀씀이가 훨씬 커져서일까요.

곳곳에 보이는 간판도 일본어로 적힌 곳이 수두룩 합니다.


더운 날씨에 이보다 더 고마울 수는 없는 시원한 디저트.

코코넛 열매를 반으로 가르고 그 속을 파낸 다음 아이스크림으로 만들어 다시 채웠습니다.

시원하면서도 맛있어서 박박 긁어먹었네요.

이렇게 간단한 3코스 식사에 세금과 팁을 포함하니 거의 5~6만원 정도 나옵니다. 10년 전 물가라는 걸 감안하면 엄청 비싼거죠.

이 식당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게 비쌉니다. 콜라 한캔에 치토스 조그만 거 한봉지 사면 5천원이 사라지는 동네였으니까요. 


하지만 바다가 좋으니 다 용서가 됩니다.

이스터섬으로 가는 비행기는 새벽에 공항에서 출발하는 관계로 몇시간 쯤 더 놀다가 떠나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아.. 진짜 일정을 이틀 정도만 더 잡을 걸.. 하고 후회막심입니다.

 

예쁜 산호 사이로 열대 물고기들이 숨바꼭질을 하듯 돌아다닙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산호를 일종의 보석 취급해서, 이걸로 장신구도 만들고 했는데...

여기는 사방에 널린 게 산호네요.


물의 온도도 딱 좋고, 이렇게 슬슬 걸어다니며 물고기 구경을 하고 있으니 왠지 힐링이 되는 느낌입니다.


좀 더 머물면서 다른 여러가지 액티비티도 해보고 싶지만.. 아쉽게도 떠날 시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수중산책을 하고, 샤워를 하고 짐을 챙긴 다음 부두로 이동합니다.


모레아 섬 선착장에서 바라본 타히티 섬의 모습.

별로 높은 산이 아닌데도 구름이 낮게 깔려서인지 은근 높아보이네요.

고갱이 저 섬에서 죽을때까지 그림을 그리며 살았는데, 막상 타히티의 고갱 박물관에는 오리지널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게 아이러니하죠.

나중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갱의 그림을 보는데, 타히티 여행을 하기 전과 후에 느껴지는 이미지가 완전히 달라서 놀랐습니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그냥 강렬하고 원시적인 느낌이었다면, 타히티를 경험한 후에는 고갱의 그림에서 남태평양 섬 특유의 생동감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요.


비행기 타기 전에 저녁 식사를 하려고 들린 타히티 버전의 먹자골목.

'롤로트'라고 불리는,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식당들은 이 곳의 명물입니다.

타히티 전통 요리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노점 음식들은 다 모여있는 듯.

 

왠지 맛있어 보여서 주문한 볶음국수. 

든든히 배를 채우고 공항으로 이동, 몇 시간쯤 기다렸다가 비행기를 탑니다. 

비행기의 목적지는 모아이 석상들이 기다리는 이스터 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