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터 섬 여행의 마지막 날.
오늘은 현지 여행사의 당일치기 투어에 참여해서 모아이가 가장 밀집되어 있는 섬의 동남쪽 해안을 돌아보는 일정입니다.
국제운전면허증만 가져왔었더라면 미니 사륜구동 바이크를 타고, 지도 한 장 옆에 끼고 홀로 돌아다녔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남지만
또 막상 일어나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어서 '차라리 승합차 타고 가이드 따라다니는 게 낫구나'라고 안심도 됩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아후 바이후.
시작부터 줄줄이 무너져 있는 모아이 석상들과 만나게 됩니다.
한 두개 넘어지거나 부서져 있을 때와는 다르게 이렇게 한꺼번에 넘어진 것을 보니 대규모 부족 전쟁이 있었다는 사실이 실감납니다.
제대로 넘어져서 굴러다니는 모아이.
세우기도 무척 힘들었겠지만 넘어트리기도 만만치않게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죽자살자 모아이를 파괴한 건 그만큼 상대 부족의 마나 공급원을 봉쇄하는 것만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오늘날로 치자면 적국의 유전지대나 군수공장을 파괴하는 거나 마찬가지랄까요.
어떤 모아이는 넘어지면서 아예 박살이 나기도 했습니다. 숫자로 치자면 제대로 서 있는 모아이보다 파괴된 모아이가 더 많지요.
부러진 돌을 이어붙이는 기술도 없던 시절이니, 이렇게 되면 또 다시 새로운 모아이를 만들기 시작.
그 과정에서 모아이를 제작하고 운반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나무들이 소모되었고, 이는 결국 섬의 황폐화를 야기시키면서 이스터섬의 멸망을 가져왔다...
...는 말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사실 모아이 경쟁이 라파누이 원주민들에게 그렇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제한된 자원의 남용과 고갈이 시사하는 바가 크긴 하지만, 막말로 말해서 당장 석유가 고갈된다고 인류 문명이 멸망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엄청나게 불편하고, 일상 생활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아지긴 하겠지만 그래도 석유 못 쓰던 시절에도 잘만 살아왔던 사람들이니까요.
라파누이들 입장에서 숲은 집을 지을 재료를 구하고 각종 자원을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고기잡이에 필수적인 배를 만드는 데도 필요한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나무가 사라졌다고 목초지가 하루 아침에 사막이 된 것도 아니고, 실제로도 원주민들은 꾸역꾸역 잘 살았지요. 물론 풍부한 산림 자원이 있을 때보다야 궁핍해졌고, 이것 때문에 인구가 감소하기도 했지만 괴멸 수준이라고 보기엔 많은 무리가 있습니다.
진짜 재앙은 유럽인들이 이스터섬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노예로 잡아가기도 하고, 몇차례에 걸쳐 학살도 자행하고, 천연두를 옮기기도 하면서 그야말로 인구가 급감, 생존자가 거의 백여명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유가 고갈된 인류는 살아남을 수 있어도 외계인에게 침략을 당한 인류는 몰살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요.
세월이 흘러 이스터 섬이 칠레 영토로 편입된 지도 꽤 지났지만 이러한 갈등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칠레에서 자본을 갖고 들어온 이주민들이 호텔이나 식당 등을 세워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을 다 걷어가고, 막상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라파누이들은 잡일이나 하면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바람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지요.
흔히 이스터섬의 모아이 석상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부분 이 '라노 라라쿠' 채석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무수하게 많은 모아이들이 운반되지 못하고 산 중턱에 묻혀있는 곳이지요.
제단 위에 돌 모자 쓰고 서 있을 때는 제주도 돌하르방 비슷하게 보이더니,
이렇게 땅 속에 묻혀 있으니 왠지 또 신비로운 외계 문명의 흔적을 보는 느낌입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모아이 콤비 아닐런지.
신비로운 분위기가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석상들이라 그런지 이스터 섬 검색을 하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대표적인 스팟입니다.
이런 느낌의 모아이 이미지들이 워낙 널리 퍼지는 바람에 막상 제단 위에 서 있는 모아이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마을 어귀에 세워진 장승처럼 보이는 모아이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지킨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으려나요.
채석장을 따라서 난 산책로를 걸으며 다양한 모습의 모아이들을 구경합니다.
비가 그치고 습기를 머금은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고대의 석상들이 서 있는 정원을 산책하는 경험은 그야말로 색다른 추억입니다.
모아이 콧구멍 사진.
왠지 예전에 봤던 모아이 석상 모양의 크리넥스 통이 생각나는 구도입니다. 모아이 콧구멍에서 휴지를 하나씩 뽑아서 쓰는 디자인이 참 인상깊었는데...
이 커다란 석상의 콧구멍에서 휴지 뽑아쓰는 상상을 하다보니 웃음이 멈추지를 않습니다. 같이 투어를 다니던 미국 애들이 이상하게 봤을 지도 모르겠네요.
하늘을 바라보는 듯 묻혀있는 모아이.
길쭉한 얼굴을 가진 거대한 석상이 땅 속에 반쯤 파묻혀서 하늘을 응시하는 모습은 마치 자신을 두고 떠난 외계인 동료들의 우주선을 기다리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모아이는 피라미드, 나스카 평원 지상화와 함께 외계 문명의 흔적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단골 손님입니다.
실제로는 만들다 말고 방치되는 바람에 생긴 결과물이지만요.
채석장에는 이렇게 파내던 중간에 제작이 중지된 모아이들도 볼 수 있습니다.
화산섬 답게 거대한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돌산이 바로 라노 라라쿠. 그나마 돌 중에서는 나름 무른 현무암인 덕에 이렇게 커다란 석상도 깎아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예전에 이집트에서 봤던 오벨리스크 채석장(http://40075km.tistory.com/22) 생각이 새록새록 나네요.
돌을 조각해서 거대한 기념물을 만드는 건 전인류 공통 문화인가 봅니다.
채석장에서 나와 다음 장소로 이동합니다.
파파바카라고 불리는, 암면 조각이 가득한 장소입니다. 사람 얼굴이나 물고기를 비롯한 수많은 조각과 구멍들이 바위에 잔뜩 새겨져 있습니다. 그 중에는 새로운 아이가 태어날 때마다 구멍을 판, 일종의 호구조사 시스템 비슷한 것도 있지요.
어딜가나 여지없이 보이는, 땅에 누워있는 모아이.
사실 따지고 보면 이런 장면이 그렇게 희귀한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남아있는 인류의 문화유산 중에서 종교나 이념의 차이로 인해 파괴된 것들은 얼마나 많은지...
아후 통가리키. 모아이 15개가 서 있는 장소입니다.
가장 많고, 또 가장 큰 모아이들이 모여있기에 반드시 들러봐야 할 곳이지요. 풀을 뜯고 있는 말들과 크기를 비교해 보면 모아이들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원래는 해일이 덮치면서 다 쓰러졌는데, 일본에서 중장비를 지원해줘서 복구했다고 하지요.
그래서 모아이를 통째로 빌려가서 일본에서 특별 전시회도 하고, 홍보도 하면서 일본인 관광객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어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이스터 섬에서는 다들 아시아인을 만나면 무조건 곤니찌와부터 말하고 봅니다. 스페인어, 영어와 함께 일본어가 가장 자주 쓰이는 언어지요.
배를 불쑥 내밀고 있는 거대한 모아이.
이걸 도대체 어떻게 옮겼을까 싶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옛날 사람들이 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하는 학자들이 이미 여러차례 시도해서 성공하기도 했지요. 가장 최근에 나온 연구 결과에 따르면 수십미터 높이의 석상이라도 50명만 있으면 밧줄과 나무를 이용해 이동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바라본 라노 라라쿠 채석장의 모습.
그야말로 산을 깎아낸 흔적이 역력합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고사성어를 보면 노인이 지름길을 만들자고 산을 파내면서 "내가 죽으면 내 후손들이 계속 산을 깎아 옮길거요. 그 동안 산이 높아지지는 않을테니 언젠가는 길이 나겠지"라고 했다던데, 그 말이 확 와닿네요.
오랜 세월, 석상을 만든다고 조금씩 파낸 돌산이 벌써 절반은 없어진 것을 보니 길을 내는 정도가 아니라 통채로 갈아버리는 것도 가능해 보입니다.
아후 테 피토 쿠라. 태양의 배꼽이라고 불리는 돌입니다.
네개의 작은 돌맹이는 동서남북을 정확히 가리키고, 가운데의 큰 돌은 자성을 띄고 있어서 나침반을 올려놓으면 바늘이 제멋대로 돌아갑니다.
가장 신기한건 그 온도.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오고 쌀쌀해서 다른 돌들은 다 차가운데 이 돌은 따뜻합니다. 날이 맑을땐 손을 대고있기 힘들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다고도 하네요.
투어의 마지막 일정인 아나케나 해변.
사방이 바다로 둘러쌓인 이스터 섬이지만 의외로 해수욕을 즐길만한 해변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나케나 해변이 아니면 오바헤 해변 정도일까요.
섬에 왔는데도 마음껏 물놀이를 하지 못해 안달이 났는지 투어 일행들은 챙겨온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바다로 뛰어듭니다. 주변 가게에서 간단한 먹거리를 사서 먹기도 하고, 타히티에서 옮겨다 심었다는 야자나무 그늘에서 휴식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미 타히티 바다를 즐기고 온 눈에는 그닥 매력적이지는 않은 해변인지라 그냥 바람을 쐬며 모아이 구경이나 하기로 결정합니다.
이스터 섬에서 마지막으로 본 모아이, 아후 나우나우.
엄청나게 큰 석상들만 보다가 이렇게 상대적으로 조그만 모아이들을 보니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스터 섬 최초의 왕인 호투마투가 상륙한 곳이 바로 이 아나케나 해변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모아이가 아후 나우나우라는 말도 있지요.
오래 전에 만들었는데도 의외로 조각의 디테일이 살아있는 모아이이기도 한데, 부족전쟁의 와중에 넘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아이들과는 달리 해변의 모래에 묻히면서 풍화작용이나 추가적인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엉덩이에 새겨진 문신 조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지요.
이렇게 나흘간의 이스터 섬 여행을 마칩니다.
말로만 들었던 신비스러운 모아이 석상들. 그리고 그 모아이를 배경으로 세상에서 가장 외딴 섬을 바닷바람 실컷 맞으며 거닐었다는 게 마음에 드네요. 복잡한 머릿속이나 막힌듯한 가슴의 응어리가 있다면 단번에 날려버릴 수 있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이유로 서태지가 8집 뮤직비디오(https://www.youtube.com/watch?v=9WLcIvqA1Uk)를 이스터 섬에서 촬영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자신을 정화하고 태초의 소리를 찾아 나선 여행"이라는 말이 이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으니까요.
"내 가슴 속에 남은 건 이 낯선 시간들. 내 눈에 눈물로 이 바다 속으로. 이 낯선 길 위로 조각난 풍경들. 이런 내 맘을 담아서 네게 주고 싶은 걸. In The Easter Island" - 서태지 8집, "Moai"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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