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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이집트:Egypt

[이집트] 아부심벨, 파라오가 남긴 영원한 사랑의 증표

룩소르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 밤 늦게 도착한 아스완. 하지만 피곤함이 다 가시기도 전에 새벽부터 일어나서 다시 버스를 탑니다. 

아부심벨 신전은 아스완에서도 또 다시 서너시간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스완에서 아부심벨로 이어지는 도로는 치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이집트 정부 방침상 모든 관광 차량은 들어갈 때나 나올 때나 무장 호위차량을 따라서 이동해야만 합니다.

덜컹거리는 관광버스 안에서 약 먹은 병아리마냥 꼬박꼬박 졸다보니 어느 새 도착한 아부심벨.

이집트 상형문자가 적힌 석판이 입구에서부터 이 곳이 어떤 장소인지 안내를 하고 있습니다. 


"누비아 한복판에 있는 아부 심벨이라는 곳에 하토르 여신께서 당신 존재의 흔적을 뚜렷이 남겨놓으셨습니다. 별들의 여신께서는 바위 속에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심으로써 사랑의 비밀을 계시하신 겁니다. 나는 그곳을 네페르타리에게 선물하려고 합니다. 네페르타리가 영원히 아부 심벨의 여인이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신전은 바위 한가운데를 파내어 만들어졌는데, 앞쪽에 있는 정문이 그곳이 신전이라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 정문이 너무나 힘차고 아름다워서 왕비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남쪽에 있는 성소 앞에는 높이가 20미터에 달하는 람세스 좌상이 버티고 있고, 북쪽 성소 앞에는 서서 걷고 있는 거대한 람세스 석상들이 10미터 높이의 네페르타리 입상을 에워싸고 있다. 

이제 아부 심벨은 단순히 선원들에게 항해의 지표 역할을 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곳은 정신의 불이 빛나고 있는 장소로 바뀌었다. 그 불은 누비아 사막의 황금 속에서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부동의 불이다." - 크리스티앙 자크, "람세스" 중에서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본다는 것은 종종 놀라운 감동을 안겨주곤 합니다. 특히 그 장소가 작품에서 묘사되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울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크리스티앙 자크는 이집트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소설에서는 학술적 관점과는 백만광년 쯤 떨어진 묘사를 자주 하면서 비판을 받는 작가입니다.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는 무조건 정의다!"라고 편파 판정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하는 그의 소설들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는 풍부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집트 문명에 애정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모퉁이를 돌자마자 등장하는, 사람을 압도하는 거대한 크기의 람세스 좌상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소설 속의 한 장면으로 들어간듯 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룩소르에서 이미 많이 본 람세스 2세의 석상이지만, 아부 심벨에서는 또 다른 느낌을 줍니다. 룩소르 신전이나 카르낙 신전이 신들을 위한 장소였다면, 아부심벨은 파라오가 자신과 왕비를 위해 건축한 사적인 공간의 이미지가 더 강해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건축왕으로 유명한 람세스 2세지만, 당시 이집트의 국가 수장으로서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카데쉬 전투에서의 승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인들에게는 페르시아 제국이 숙적이었고, 고대 로마인들에게는 카르타고가 숙적이었듯이 고대 이집트인들의 숙적은 힛타이트라는 나라였습니다. 한참동안 티격태격 싸워왔는데, 람세스 2세가 이끄는 카데쉬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두 나라 사이의 안정기가 찾아왔지요.

소설 람세스에서는 파라오가 힛타이트 군대의 매복에 걸려 위기에 처하자 갑자기 이집트의 신이 빙의되면서 번개를 뿌리며 적들을 섬멸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만, 실제로는 추격하던 힛타이트 군인들이 파라오가 도망치면서 놓고 간 보물을 약탈하느라 전열이 흐트러지고 그 사이에 이집트 후속 군단이 발빠른 대처를 하며 승리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반적입니다.

어쨌거나 카데쉬 전투의 승리는 람세스 2세의 가장 큰 업적이었고, 당연하게도 아부 심벨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에 깊숙히 새겨 파라오의 업적을 찬양하는데 쓰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의미깊은 것은 그 당시만 해도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참동안은) 국가간의 전쟁은 어느 한쪽이 완전히 멸망하거나 몰락할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람세스 2세는 시대를 앞서가며 힛타이트와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는 점이지요. 물론 거기에는 낙후된 교통 및 통신체계로 먼 거리까지 통치할 수 없기에 서로 한발씩 양보한 결과물이라는 이유가 있지만, 일방적 항복이 아닌 상호 존중의 평화 협정이라는 것 자체가 시대를 앞선 산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람세스 좌상을 자세히 보면 관광객들이 파놓은 낙서가 눈에 띕니다.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 나가서까지 한글로 "아무개 다녀감"이라는 식의 낙서를 하는 것이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이런 걸 보면 1800년대 서양 사람들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나 봅니다. 

다리 주변에는 왕비와 딸들의 모습이 이집트 전통에 따라 조그맣게 조각되어 있습니다.

 

대신전의 바로 옆에는 상대적으로 조금 작은 크기의 신전이 또 하나 있습니다.

람세스 2세가 왕비인 네페르타리를 위해 만든 곳이지요.

왕비를 위한 신전답게 이곳에서만큼은 네페르타리과 람세스 2세와 같은 크기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이집트 건축사상 왕비가 파라오와 같은 비중으로 조각된 것은 아부 심벨이 유일하다고 하니, 이것만 봐도 람세스 2세의 아내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신전답게 파라오와 왕비, 그리고 여러 신들을 찬양하는 상형문자가 벽은 물론이고 천장까지 빼곡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 거대한 유적이 원래 있던 자리가 이곳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집트 정부가 아스완 댐을 건설하면서 호수의 수위가 높아지는 바람에 아부심벨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유네스코에서 기금을 마련해서 1960년대에 모든 유적을 200미터 떨어진 장소로 옮깁니다. 돌로 만든 산 전체를 20~30톤짜리 블럭으로 잘라서 옮긴 다음 그대로 다시 쌓아올린 거지요.

돌산을 들어다 옮긴다니 그런 무모한 계획이 어디 있나 싶기도 하지만, 생각해보면 수천년 전 이집트 인들은 이미 훨씬 더 먼 거리를 이동해서 피라미드를 쌓았으니 현대인의 자존심이 걸린 프로젝트였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호송 차량 복귀시간이 다가온 관계로 아쉬움을 남기고 아부 심벨을 떠나 아스완으로 돌아옵니다. 선두 무장 호위차량 뒤로 수 많은 관광버스들이 줄줄이 따라서 달리는 걸 보면 우습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 길이 진짜 위험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이집트 정부에서 호송료 받아먹으려고 그러는 건지 의구심이 생기기도 합니다. 이집트에서 며칠만 지내면 돈 낼 일이 생길때마다 '이거 바가지 쓰는 거 아닌가' 의심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거든요.

돌아오는 길에 휴게소에 잠시 들렀는데 고양이를 한 마리 만난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이 신성시하며 길렀던 애완동물이라 그런지 이집트에서 보는 고양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색다른 곳이 있습니다.


이집트의 다른 대도시들이 그렇듯이 아스완에도 나일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나일강 위로 둥둥 떠다니는 펠루카 보트들을 보며 '여기가 4대 문명의 발상지'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립니다.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채석장.

그냥 채석장이 아니라 오벨리스크를 만들던 작업장입니다.

아스완은 질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는 곳이라 오벨리스크 뿐 아니라 신전을 만드는 돌이나 피라미드의 외장용 화강암도 모두 이곳에서 채취했습니다. 커다랗게 잘라낸 돌덩어리들을 배에 싣고 나일강을 따라 기자의 피라미드까지 옮겼던 거지요.

자동차를 타고도 질릴 정도로 오랜 시간을 이동해야 하는 거리를, 그 옛날에 무거운 돌덩어리를 싣고 운반했다니 '이집트 고대문명의 신비'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벨리스크 채석장에는 만들다가 중간에 금이 가는 바람에 버려진 미완성 오벨리스크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크기만 따져보면 이집트에서 가장 큰 오벨리스크라고 하는데, 사람과 크기를 비교해 보면 얼마나 큰지 실감이 됩니다.

하지만 이걸 보는 내내 든 생각은 '대단하다'거나 '완성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는 게 아니라 '이거 만들던 책임자는 어떻게 됐을까?'입니다.

제작 초반에 갈라진 것도 아니고, 거의 다 파서 이제 떼내기만 하면 되는데 빠직 갈라지는 모습을 보며 공사 책임자가 느꼈을 절망이 어떤건지 상상을 합니다.


채석장 구경을 하고 쇼핑투어 코스로 이동합니다. 패키지 관광이 저렴한 가격으로 나올 수 있는 원동력이지요.

패키지 관광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인솔자와 현지 가이드가 붙어다니면서 해외 출장나간 사장님 따라다니는 비서마냥 각종 편의를 봐준다는 데 있습니다. 이게 없으면 그냥 여행 일정 짜주고 숙소와 교통편 예약해주는 대행 서비스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이드와 인솔자 및 운전수 인건비가 아주 적게 책정되거나 아예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게 여행 경비에 포함되면 가격이 너무 올라가거든요. 그래서 패키지 관광에는 옵션 관광이나 쇼핑 관광이라는 코스가 꼭 끼어듭니다. 여행객들이 추가적인 관광상품 (이집트의 경우엔 낙타 투어나 펠루카 보트 타기 등)을 구매하거나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하면서 일정량의 커미션을 떼서 가이드나 인솔자 몫으로 챙겨주는 거죠. 그래서 예전에 어떤 패키지 여행팀은 하도 사람들이 옵션 관광도 안 하고 물건도 안 사니까 현지 가이드가 여행 일정 중간에 그냥 도망쳐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큰 여행사라면 다른 인원을 투입하겠지만 소규모 여행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참 난감하겠지요. 저야 이때만 해도 가난한 학생인지라 다른 중년 일행들이 물건 사는 거 보면서 속으로 '덕분에 제가 싼 값에 여행합니다, 감사합니다' 했습니다만.

그래서 패키지 여행 여러 번 다닌 사람들은 가이드나 인솔자 팁 준다는 생각으로 지정 상점에서 물건을 구매합니다. 큰 여행사 패키지로 가는 거면 최소한 물건이 가짜일 확률은 거의 없거든요. 특히 이집트나 인도처럼 관광산업이 발달한 후진국은 가짜 물건에 뒷통수 맞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기념품 중 하나가 파피루스 책갈피인데, 이게 실제로는 파피루스가 아니라 바나나 껍질을 가공해서 만든 게 대부분입니다. 아니면 화강암으로 만든 이집트 전통 석상을 구입했는데, 나중에 끄트머리가 깨져서 자세히 보니 석고로 만든거더라 하는 일도 있지요.

대부분의 경우, 큰 여행사 지정 상점은 이런 걱정은 없습니다. 한 번 사기쳐서 거하게 벌어먹는 것 보다는 단체관광객에게 꾸준히 팔아먹는게 더 낫거든요. 단지 커미션이 붙으면서 가격이 비싸진다는 건데, 이게 도저히 용납못할 수준으로 바가지를 쓰는 건지 아니면 배낭여행 다니면서 흥정하는 것 보다야 비싸지만 한국에서 구입하는 것과 비교해보면 충분히 메리트가 있어서 살만한 건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 여행 일정 내내 호루스의 눈이 그려진 파피루스, 상형문자로 내 이름을 새긴 목걸이, 앙크 십자가, 카노푸스 (미이라 내장 담는 항아리)를 본따 만든 조그만 장식품 같은 자질구레한 기념품들만 구입했습니다...만.

쇼핑투어에 향수 상점이 포함되는 바람에 그만 눈이 뒤집어지고 말았네요. 아로마테라피에 빠져있던 시기인지라 중동지방 특산품 향수 원액들을 보고 미친듯이 쓸어담았죠. 종업원들이 '뭐지, 저 이상한 놈은'하는 눈초리로 보더군요. 원래는 이런저런 원액 대충 섞어서 알콜 잔뜩 부은 다음 '파라오의 연인'이니 '사막의 눈물'이니 하는 그럴듯한 이름 붙여서 호구들 벗겨먹어야 하는데, 왠 놈이 달려들어서 에센셜 오일 원액을 대용량 용기에 넣어달라고 주문하고 있으니 말이죠. 유리로 만든 소형 향수병은 진열대에 있는 거 다 쓸어담고... 나중엔 종업원이랑 이메일 주소 교환하고 선물도 받고 하면서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만족할만한 쇼핑을 했습니다. 

  

쇼핑 투어가 끝나고 저녁 식사를 하러 펠루카 보트를 타고 나일강을 따라 이동합니다. 어둑어둑해지는 나일강을 따라 배를 타고 가는 것도 나름 운치가 있습니다.


여행 내내 이동 시간이 워낙 길어서인지 제대로 자리잡고 여유롭게 밥을 먹을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호텔에서 아침 뷔페는 거하게 먹어도, 투어 중간에 레스토랑 들르기는 쉽지 않더라구요. 야간 침대차 타고 룸서비스로 나오는 기내식(?)을 먹는 것도 나름 재밌는 추억이지만, 그러다보면 편한 자리에 앉아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인지 여러가지 요리가 접시에 담겨서 나오는 걸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는 입돌아가게 짠 야채 절임도 유쾌한 기분으로 먹게 됩니다. 더구나 물 값이 공짜! 그것도 시원한 물인데! 이집트에서 먹는 물에 돈 안 받는 식당은 처음입니다. 나름 고급 식당이라는 걸까요.


메인 요리는 비둘기 고기입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 이집트 곳곳에 세워져 있는 비둘기 집을 보면서 꼭 한 번 먹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서 그 맛을 봅니다. 뭐, 고기맛은 닭고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동지방 특유의 소스가 이국적인 느낌을 만들어 내지요.

이렇게 맛있는 저녁식사로 배를 채우고 다시 기차를 탑니다. 이제 남은 여행지는 이집트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바하리야 사막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