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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이집트:Egypt

[이집트] 사막이 보여주는 여러 얼굴, 바하리야

이집트는 고대 유적이 가득한 나라입니다만, 다르게 생각하면 유적 말고 특별히 즐길 것이 많지 않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피라미드, 미이라, 고대 신전, 상형 문자 뭐 이런 것들이 일주일짜리 일정 내내 가득하다면 손님 모으기 힘들다는 생각에서인지 패키지 여행사들은 사막 투어를 끼워넣으며 '별이 쏟아지는 낭만적인 사막의 밤'을 선전하곤 합니다.

그 낭만을 경험하기 위해 이집트 남쪽 끝인 아부 심벨에서 다시 카이로까지 올라온 다음, 서쪽의 바하리야 사막으로 이동합니다.

점점 건물이 뜸해지고 황무지 분위기가 나는데도 이슬람 사원은 계속 눈에 띕니다. 주변에 신도들이 얼마나 있을런지?

  

이집트에서 두번째로 만난 고양이.

원래 검은색 고양이는 마녀의 애완동물이네, 불운의 상징이네 하는 말이 있는데 이집트에서는 워낙 신성시되던 동물이라 그런지 검은 고양이의 포스가 남다르게 느껴집니다.

"악령같은 게 들어와도 내가 하악질 한번 하면 다 떨어져 나가."라고 자신만만하게 장담하는 용한 무당 포스랄까요.


사막에 가까워져서 그런지 휴게소를 비롯한 건물들이 통풍에 신경써서 지은 것처럼 보입니다.

한마디로 휑~하다는 거죠. 문도 아예 안 달아 놓고, 바람을 막는 거추장스러운 가구도 없고, 

차가운 돌바닥에 양탄자 하나 깔아놓고 앉으면 나름 시원합니다.


휴게소 문 밖에서 가시덤불 뜯어먹는 당나귀. 

서울 촌놈(?)이라 당나귀는 동물원에서나 가끔 봤는데 현업에 종사하는 모습을 보니 왠지 신기하네요.

수레 바퀴만 현대식인게 재밌습니다.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출발합니다.

점점 울퉁불퉁해지는 길과, 점점 심해지는 모래먼지.

지금 돌이켜보면 왠지 "What a lovely day!"를 외치며 은색 스프레이라도 입에 뿌릴 분위기였는데, 아쉽게도 그 당시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http://blackdiary.tistory.com/1203)가 개봉하기 전이었네요.

 

그나마 드문드문 보이던 풀밭이나 덤불도 사라지고, 점점 돌멩이와 모래의 비율이 높아집니다.

워낙 험난한 환경이다보니 사막 투어를 할 때는 자동차 상태를 잘 봐야한다는 말도 있더군요.

특히 차량 한대에 타고 이동하는 소규모 투어일 경우, 모래와 고열로 인해 차가 퍼지기라도 하면 도와줄 사람도 없는지라 아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귀중한 여행 일정 중에서 하루 내지는 하루 반나절은 그냥 길 위에서 모래바람 맞으며 버리게 되죠. 그렇다고 관광객 대상으로 장사하는 현지인들이 책임감을 갖고 뭐라도 보상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작렬하는 태양 아래 모래 사막이 점점 드러납니다. 

하지만 오늘의 목적지는 모래 사막이 아니라 하얀 사막.

바하리야의 특징이라면 다양한 종류의 사막을 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흔히들 사막이라고 하면 떠올리게 되는 모래 사막 뿐만 아니라 백사막, 흑사막에 크리스탈 마운틴까지 한 번에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집트에서 사막 투어로 유명한 장소가 바하리야와 시와 두 군데인데 시와 사막은 그야말로 사막 본연의 모습에 충실한 모래 사막입니다. 상상했던 모습을 두 눈으로 본다는 점에서는 좋을지 모르겠지만, 듣기로는 좀 지루하다고 하더라구요.           


드디어 도착한 백사막.

오랜 세월 바람에 의해 풍화작용을 거쳐 깎여나간 하얀 암석들이 여기저기 박혀 있습니다.

사람보다 훨씬 더 큰 바윗덩어리들이 사막 한복판에 있으니 왠지 외계 행성에 온 기분입니다.


지표면 가까운 곳에 바람이 더 세게 불어서 일까요. 밑둥만 깎여나가는 바람에 버섯처럼 보이는 암석들이 여기저기 보입니다.

특이하게 생긴 바위들은 속으로 이름을 붙여줍니다. '버섯, 닭머리, 핵폭발, 돌주먹...'  

그렇게 이름을 붙여주며 돌아다니다 보면 꽃이나 별처럼 생긴 검은 돌멩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플라워 스톤이라고 불리는 이 돌들은 화산석이 바람에 마모되며 독특한 모양을 갖게 되었다고 하는데, 예쁘게 생긴건 기념품 삼기 딱 좋습니다.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해가 넘어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지평선 끝까지 뻗은 모래밭 위로 하얀 바위들이 드문드문 널려있는 모습은 왠지 비현실적인 느낌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술이 초현실주의인지라 눈물나게 마음에 드네요.

블라디미르 쿠쉬가 이런 느낌으로 그림 좀 그려줬으면 좋겠습니다.


하도 밑둥만 깎여나가다 보니 가끔 이렇게 부분적으로 무너져내린 기암괴석도 있습니다.

왠지 헬멧처럼 보여서 일행들이 돌아가며 저 움푹 파인 부분에 얼굴이 들어가도록 앵글 잡아서 컨셉 사진을 찍었네요.

 

해가 완전히 지고, 베두인족 투어 가이드들이 만들어준 바베큐를 맛있게 먹고 사막의 밤을 즐깁니다.

그러다 발치에서 왠 벌레가 움직이길래 뭔가 했는데, 이집트 풍뎅이네요.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 곤충이 말똥을 둥글게 굴리는 모습이 태양을 움직이는 것 같다고 해서 신성시 했습니다.

보석으로 조각해서 부적으로 삼을 정도였으니, 내게도 뭔가 좋은 일이 생기려나 보다 하는 기대를 갖게 만듭니다.

뭐, 영화 '미이라'에서는 주로 떼거지로 등장해 사람 잡아먹는 모습을 보이긴 했습니다만 그거야 왕의 무덤을 침입한 불청객들을 벌주기 위한 함정이었지요.

...그러고보니 나도 파라오의 무덤을 들락거렸네?


베두인족 가이드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식사 준비를 끝내놓고, 일행이 묵을 텐트도 다 펴주고, 밤 늦은 시간에 손님들 심심할까봐 함께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춥니다.

가운데 비스듬하게 누운 아저씨는 천일야화 세헤라자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게 왠지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나 해 줄 것 같은 분위기지만, 아쉽게도 영어를 못해서 말이 통하질 않습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왁자지껄하게 웃고 떠들던 시간도 지나면 점점 조용해지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로 바뀌어 갑니다.

사막의 밤은 엄청나게 춥다고 해서 걱정했건만, 한국의 겨울 혹한처럼 죽을듯이 춥지는 않습니다. 워낙 낮이 더운 바람에 일교차가 심해서 상대적으로 더 춥게 느껴지는 거지, 실제로는 선선한 가을 밤 날씨 쯤 되려나요.

밤하늘 가득한 별들 사이로 가끔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에 잠깁니다.

 

이집트 여행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서인지 일행들 모두 잠을 자지 않고 사막의 풍경을 즐깁니다.

지평선 너머로는 다른 투어팀들의 불빛이 밝게 빛나는 것이 보입니다.

그러다 갑자기 뒤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쳐다보니, 사막 여우가 어느 새 코 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운 좋으면 음식 찌꺼기 먹으러 오는 사막 여우를 볼 수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정말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여우가 원래 좀 귀염상인데다가 귀가 얼굴만큼 크다보니 엄청 사랑스러워서 정말 비싼 돈 주고 애완동물로 키운다는 사람들 심정이 이해가 됩니다.

어린 왕자가 그랬던 것처럼 길들여보고 싶은데, 여행 일정상 무리인지라 그냥 구경만 합니다.

급하게 사진기를 꺼내 몇 장 찍기는 했는데, 여우가 도망갈까봐 깜깜한 밤중에 플래쉬도 못 터뜨리고 찍다보니 초점이 쓰레기 봉투에 맞춰져 버렸네요.

요즘 같았으면 어지간한 스마트폰으로 찍어도 잘 나왔을텐데, 이때만 해도 엄청 비싼 카메라 아니면 야간 촬영은 힘들었던지라... 지금도 여행 사진 찍은 것 중에 아쉬운 걸로 순위 매기면 세손가락 안에 드는 순간입니다.

   

하늘 한 쪽이 밝아온다 싶더니 해가 지평선 너머로 솟아오릅니다.

백사막 투어 내내 풍경이 왠지 친숙한 느낌이라 '전생에 내가 베두인 족이었나' 싶었는데, 해 뜨는 장면을 보니 왜 이곳이 익숙한지 알 것 같습니다.

딱 스타워즈 영화의 사막행성, 타투인 분위기네요. 

일출 장면이 마음에 들어 나중에는 연하장 사진으로 써먹기도 했습니다.


백사막을 떠나 크리스탈 마운틴으로 이동합니다.

언덕 전체가 암석으로 뒤덮여 있는데, 자세히 보면 다 수정 조각입니다.

그렇다고 수정 동굴에서나 볼 법한 준보석급 수정은 아니고, 대부분 흙 속에 묻혀서 그저 좀 특이한 돌처럼 보입니다.

만약 이 산에 묻혀있는 수정들이 다 투명하게 반짝거렸다면 사막의 태양이 반사되는 빛에 눈이 부셔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을 듯.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들 집어가서 훼손이 심한 관계로 채취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적으로 부서져서 땅에 떨어진 조각 한두개 정도 집어가는 건 괜찮다고 하더군요.

백사막에서는 플라워스톤 주워가며 더 예쁜 게 보이면 못생긴 녀석 버리고 교체했는데, 여기서는 수정 조각을 주워가며 더 예쁜 조각을 찾게 되네요.

사막에서 밤새워가며 인생의 의미는 뭔가,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뭐 이런 생각 하며 고상한 척 했던 게 바로 다음날 수정 조각 하나 줍겠다고 다 무너집니다.


모래 언덕도 들러 상상했던 사막 그대로의 모습을 구경합니다.

지평선 너머에서 낙타를 줄줄이 이끌고 이동하는 상인 무리의 모습이 어울릴 듯 한 분위기입니다.

이 당시에 SF소설 '듄'을 읽은지라 왠지 거대 샌드웜이 바닥에서 튀어나와 자동차를 습격하는 상상도 해 봅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면 여기서 보드를 타고 샌드 서핑도 즐길 수 있다는데, 여행 일정상 아쉽게도 스케쥴이 맞질 않네요.

'신발에 모래 알갱이 들어간 것도 신경 거슬려 죽겠는데, 모래 언덕에서 뒹굴 필요까지야 있겠나'라고 위안 삼아봅니다.


바하리야의 마지막 모습, 검은 사막입니다.

검은 사막이라고 하니 왠지 게임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막 위에 화산재와 화산석이 뒤덮이며 생긴 실제로 존재하는 지형입니다.


멀리서 보면 무슨 수풀이 우거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 화산 분출로 인해 생긴 검은 돌과 모래들입니다.

사막은 무조건 노란 모래가 가득한 세상이라고 여겨왔던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깨버리는 풍경입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하리야 사막에서의 여정을 모두 마치고 카이로 공항으로 이동합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다시 들른 카이로.

건물 너머로 뾰족하게 솟아오른 피라미드 꼭대기가 보입니다. 마치 서울 시내에서 남산타워 보이듯 보이네요.

이렇게 이집트에서의 5박6일이 지나갑니다.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던 고대 이집트 유적들을 가슴에 품고,비행기를 탑니다.

이제 남은 여정은 스탑오버로 잠시 머무는 두바이에서의 짧은 당일치기 일정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