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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칠레:Chile

[칠레]이스터섬, 배를 타고 화산을 넘어 온 라파누이들

타히티에서 대략 다섯시간 반의 비행 끝에 도착한 이스터 섬. 

이스터 섬의 유일한 공항인 마타베리 공항은 활주로는 엄청 넓은 데 비해 공항 청사는 무슨 시골 기차역을 방불케 합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이 공항이 우주왕복선의 비상착륙 후보지 중의 하나라서 NASA에서 활주로 확장 공사에 돈을 댔다고 하네요.

하긴, 바다 한가운데 외딴섬이니 태평양 한복판에 불시착하게 생긴 우주선이라면 제일 가까운 착륙지가 이스터 섬일 수 밖에 없습니다.

게이트는 커녕 셔틀도 없는지라 비행기에서 계단 타고 내려와서 입국 심사대까지 뚜벅뚜벅 걸어갑니다.

입구에는 칠레 국기가 휘날리고 있습니다.


공항에서 이스터 섬 유일의 번화가(?)인 항가로아 시내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원래는 구글에서 숙소 목록을 검색해서 갔는데, 막상 시내를 걷다보니 마음에 드는 숙소가 보이는데 가격도 괜찮길래 그냥 짐을 풀었습니다.

처음으로 만나게 된 모아이는 숙소 입구에 장식품으로 세워 놓은 모아이들입니다. 


이스터 섬에서 나흘간 묵은 숙소. 비수기라 그런지 아니면 원래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서 그런지 큰 방을 굉장히 싸게 얻었네요.

남미 여행하다가 넘어온 사람들은 외딴 섬 물가가 비싼 걸 실감한다던데, 타히티에서 넘어온 입장에서는 모든 게 저렴하게만 느껴집니다.

정원에 이스터 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조각들이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는데, 일정내내 만족스러웠습니다. 조식 포함인데 밥도 맛있고...

 

이스터 섬 유일의 도시...라기보다는 마을 골목에 가까운 항가로아입니다.

대도시의 한 두 블럭 정도밖에 안되는 거리에 섬 유일의 은행이라던지 섬 유일의 인터넷 카페라던지 섬 유일의 약국이라던지 하는 것들이 모여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오락실. 우리나라 8~90년대 분위기가 나는 오락실이 있길래 추억에 잠겨서 동전 넣고 한 게임 했지요.

그런데 오락실 스틱 잡자마자 어디서 몰려왔는지 동네 아이들이 우글우글 달라붙어 구경합니다.

비행기 목숨 세 개 있는거 한 명 씩 돌아가면서 하라고 손짓발짓으로 말하고 비켜주니 신이 나서 달려드는게, 진짜 옛날 생각 나더군요.

20원짜리 오락실 요금이 50원으로 올랐을 때는 진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마을을 벗어나면 태평양 한가운데 외딴섬이니 당연하게도 넓은 바다가 펼쳐집니다.

어디서 보건 똑같은 바다일텐데, 이스터 섬에 와서 그런지 바깥 세상과 단절되었다는 기분이 드는 게 신기합니다.


바위 틈새로 솟구치는 바닷물. 

해변과 이어지는 구멍이 뚫려 있는건지, 파도가 칠 때마다 바위 틈에서 분수처럼 바닷물이 솟아 오릅니다.


원래는 해변 도로를 따라 가볍게 산책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트래킹 안내 표지판을 보니 끝까지 갈 생각을 합니다.

스페인어로 적힌 표지판이라 읽을 수는 없지만, 대략의 방향과 거리를 알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됩니다.

마을에서 출발하는 이 트래킹 코스는 화산 분화구에서 끝납니다.


이스터 섬에서 처음으로 만난 진짜 모아이 석상.

아후 리아타라고 불리는 모아이 유적입니다. 마을을 다 벗어나기도 전에 이렇게 큰 모아이 석상을 보게 되니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 좀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서태지 8집 뮤직비디오가 나오기 전이었으니, 그걸 보고 나서 왔더라면 좀 더 친근감이 느껴졌을까요.


화산섬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돌아다니면 돌아다닐 수록 이스터 섬은 참 제주도와 닮은 점이 많습니다.

바람도 많고, 돌도 많고, 말도 많고. 심지어는 사람 모양 돌조각도 잔뜩 있고.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산책로를 걷다가 말들을 보니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듭니다.

제주도 돌하르방도 크기 엄청 크게 만들었으면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관광지가 되었을까요. 


바람이 시원하기는 해도 햇빛이 워낙 강한지라 계속 걷다보면 땀이 납니다.

지친 발도 달랠 겸, 바닷가 절벽 위에 세워진 휴게소에서 잠시 쉬어갑니다.

얼기설기 엮은 지붕 아래서 삐뚤어진 통나무 의자 위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남태평양의 푸른 바다를 감상합니다.

 

맨날 가공된 것만 보다가 이렇게 진짜 자라는 것은 처음 보게 된 알로에.

알로에 농장인지, 사람 키만큼 커다란 알로에가 빽빽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아나카이 탕가타라는 이름의 해안 동굴.

'아나'는 동굴이라는 의미, '탕가타'는 사람이라는 의미, '카이'는 먹는다는 의미의 라파누이 언어입니다.

해석해보자면, 사람... 먹는... 동굴?

실제로 이스터 섬 원주민인 라파누이들은 폴리네시아 계통이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식인 풍습으로도 유명하니 이 동굴에서 식인 의식이 벌어졌다고 해서 놀랄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고학자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식인이 벌어졌다는 증거가 없고, 고대 라파누이어로 '카이'는 먹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이다, 가르치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부족들이 회합을 벌이던 장소라는 주장이 더 신뢰를 얻고 있습니다.

동굴로 몰아치는 파도가 호쾌한 장관을 이루는 게, 튜브 하나 띄워서 파도를 타면 이만한 익스트림 스포츠가 또 없겠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점점 오솔길로 변해가는 트래킹 코스.

이 길이 맞나 슬슬 불안해 지다가도 이렇게 관광객용 쪽문 비슷한거라도 발견하면 '아, 내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안도가 됩니다.


고대인들의 정원, 마나바이. 

돌로 둥글게 울타리를 쌓고 그 안에 여러가지 식용 작물들을 기르는 곳입니다.

트래킹 코스에 조성된 마나바이는 관광객들을 위해서 잘 정돈되어 있고, 실제로 그 속에서 나무나 여러 식물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이스터 섬을 돌아다니다 보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유물이기도 합니다.


히비스커스 차를 종종 마시곤 했는데 실제로 이렇게 자라는 것은 처음 보네요.

붉은 꽃잎을 말려서 차로 달여 마시는데, 차 색깔이 예쁘면서 비타민이 풍부해서 많이들 먹는다더군요.


점점 경사가 생깁니다. 그래봤자 동네 뒷산 수준이지만, 워낙 오래 걸어서인지 슬슬 다리가 아프네요.

땀이 송글송글 맺히면서 '이 언덕만 넘으면 될라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갑자기 앞이 확 트이며 라노 카우 화산 분화구가 눈 앞에 나타납니다.

참 여러번 사진을 찍었는데도 그 장쾌함을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찍을 때도 느낀 거지만, 너무 크면 오히려 크다는 느낌을 주기가 힘든 듯 합니다.

직경이 대략 1km 정도 되는 커다란 분화구인데 어떻게 찍어도 길 가의 물웅덩이마냥 보이니... 실제로는 절로 환호성이 나오며 가슴이 뻥 뚫릴 정도로 시원한 풍경입니다. 

분화구 한 쪽은 무너져 있는데, 전설에 따르면 바다를 항해하던 폴리네시아인들이 저 귀퉁이가 무너지면서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에 함께 쓸려들어오면서 라파누이 원주민이 시조가 되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라노 카우 분화구에서 바라본 항가로아 시내. 길쭉한 활주로가 손에 잡힐듯이 보입니다.

그 뒤로는 구름에 가려진 해발 500m의 테라바키 산이 희미하게 보이네요. 지금 서 있는 남쪽 끝에서 섬의 북쪽 끝까지의 거리가 대략 10km 정도이니 걸어다닐 만큼 조그만 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엄청 넓다고 할 수도 없는 그런 섬입니다. 비포장도로가 많아서 자전거보다는 오토바이나 미니4륜 ATV가 관광객들의 주요 교통수단입니다.

불행하게도 국제 운전면허증을 안 가져오는 바람에 그냥 뚜벅이 신세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요.

그래도 일정 중의 하루는 라파누이 원주민과 함께 말을 타고 섬의 북쪽 끝까지 돌아 볼 계획입니다.

 

섬의 동북쪽 해안. 이스터 섬 전체에 모아이 석상이 널려있지만, 이 동쪽 해안가에는 그야말로 엄청난 수의 모아이 석상들이 세워져 (혹은 쓰러져) 있습니다. 

워낙 그 수가 많다보니 꼭 들러야 할만한 주요 유적지를 다 찾아 돌아다니는 것도 큰 일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현지 투어를 통해 동쪽 해안을 싹 쓸어보기로 결정.

이렇게 섬의 남쪽 끝에서 전체를 둘러보며 앞으로의 일정을 짜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지면서 이스터 섬에서의 첫 날이 지나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