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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칠레:Chile

[칠레]이스터섬, 말을 타고 돌아보는 이스터 섬 한바퀴

말이 많은 곳에 왔으니 말을 타고 섬을 돌아보는 것도 좋겠다 싶어 신청한 승마 투어.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여러가지 코스가 있지만, 그 중 가장 긴 코스를 선택합니다. 원주민과 함께 말을 타고 남들은 잘 가지 않는 섬의 북쪽 끝까지 돌고 오는, 하루가 꼬박 걸리는 여행길.

오랫동안 말을 타고 돌아다니면 배고프겠다 싶어서 아침을 든든히 먹어줍니다. 숙박에 조식이 포함되어 있는데, 나름 여러가지 재료를 구색 맞춰서 푸짐하게 준 덕에 여행 내내 잘 먹었지요. 빵은 좀 넉넉하게 달라고 해서 몇 개 남은건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간식으로 먹어도 꿀맛.


자동차를 타고 목장으로 가서 현지인 가이드와 만납니다. 의외로 투어를 신청하는 사람이 많지는 않은지, 가이드와 일본에서 온 여대생 한 명을 포함한 세 명이 전부. 

여자 혼자서 세계 일주 여행중이라는데, 라틴 아메리카를 다 돌고 아시아로 넘어가는 길에 이스터 섬을 들렀다더군요. 시간과 예산때문에 띄엄띄엄 방학 때나 휴가 때만 여행을 하는 입장에서는 꽤나 부러운 일입니다. 

손가락에는 붕대를 칭칭 감고 있길래 어디서 다쳤는지 물어봤더니 원숭이한테 물린 상처랍니다. 따로 배운 적도 없다는 스페인어(칠레 공용어)도 유창하게 하고, 말도 엄청 잘 타는 걸 보면 여행자를 넘어 모험가의 관록이 보입니다. 세계 일주를 하다 보면 저렇게 되려나요.


드디어 말을 타고 길을 떠납니다. 한두시간짜리 승마 체험을 해 본 적은 있어서 별로 어렵지 않게 생각했는데, 오래간만에 타는 말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스터섬의 말들이 좀 억세서 그런지 얼마 타지도 않아 허벅지가 저려옵니다. 

보통은 말을 탄다고 하면 굉장히 편하고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승마는 엄청난 운동량을 자랑합니다. 측정 방법에 따라 달라지기는 하지만 거의 가볍게 뛰거나 파워워킹 하는 수준으로 칼로리를 소모하지요. 하루 종일 말을 탄 건 처음인데, 유산소 운동이라기보다는 근육을 혹사시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승마술이 별로라도 말이 알아서 앞서 가는 가이드를 따라 간다는 거. 앞에 가는 말이 달리면 저절로 따라서 달리고, 앞에서 서면 자기도 서고. 따각거리면서 걷는 것 보다 아예 빠르게 달리는 게 엉덩이는 덜 아프더군요.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섬의 서쪽 해안을 따라 북쪽 끝까지 따라 올라갑니다.

넓게 펼쳐진 대서양, 그 위로 떠오르는 태양, 이를 배경으로 말을 타고 초원을 가로지르는 상쾌함은 흔히 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가는 길에 잠시 멈추더니 가이드가 땅에 박힌 바위를 가리키며 설명을 해 줍니다.

옛날부터 라파누이 원주민들은 이렇게 바위에 그림을 그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물고기 문양, 조인 문양 등.

나중에는 목판에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자를 새기기도 했는데, 롱고롱고라고 불리는 이 문자는 목판이 몇 개 남아있을 뿐 별다른 기록이 없어서 아직도 해석을 못 하고 있지요.


섬의 북쪽 끝에 다다르자 갑자기 경치가 확 변합니다.

깎아지른 듯한 바닷가 절벽에 집채만한 파도가 부딪히는데 무슨 태풍 기상특보에 나오는 방파제를 보는 기분입니다.

사진상으로는 실감하기 힘들지만 어지간한 건물 높이로 솟아오르며 부서지는 파도는 그야말로 호쾌한 광경.


가이드 아저씨가 여기서 점심을 먹을 거라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무슨 점심을 먹는다는 건지 궁금해 하는데 가방에서 주섬주섬 닭다리 하나를 꺼냅니다.

조리도 되지 않은 생 닭다리 하나로 세 명이서 점심을 먹자는 건가 의아해 하는데, 또 다시 가방에서 실 꾸러미를 꺼내듭니다.

닭다리 살을 조금 떼어내서 실에 달린 바늘에 꿰더니 절벽 끝으로 가서 휙 던집니다.


낚시를 해서 생선으로 점심을 먹을 모양입니다.

파도가 워낙 거센데다가 저런 어설픈 도구로 어느 세월에 물고기를 낚아 점심을 먹나...라는 생각을 하려는 순간.


닭다리 던진지 30초. 벌써 한마리 걸려서 올라왔습니다.

그 후로도 미끼 달아서 던지면 무조건 30초나 1분에 한마리. 그 시간도 대부분 물고기를 절벽까지 끌어올리는 데 쓰이니 실제로는 던지자 마자 물고기가 걸려든다고 봐도 될 듯.

그야말로 생선들이 줄서서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네요. 고급 낚싯대 들고도 하루종일 허탕치는 분들이 보기엔 천국과도 같은 곳이 아닐런지.

이렇게 건진 생선은 단번에 아가미를 물어 뜯어서 늘어놓습니다. 터프한 가이드 아저씨.. 후덜덜.


닭다리 반 개가 생선 여섯 마리로 바뀌는데 걸린 시간은 10분 남짓. 

불 피울 준비를 하는 동안 말과 놀아줍니다. 실제로는 말이 놀아주는 거지만요. 

힘들게 일하고 겨우 쉬는데 왜 방해하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당근이라도 좀 가져올 걸...

 

하늘을 올려다보니 햇무리가 보입니다. 달무리와는 다르게 의외로 흔히 보기 힘든 기상현상이라던데 이 먼 외딴섬에 와서 보게 되니 신기한 기분이네요. 예전에 읽었던 소설의 한 장면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해는 이미 높이 떠올랐으나 짙은 안개 때문인지 아직도 날이 밝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태양의 주변으로는 기둥 같은 것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저기에 기둥이 서 있는 것 아닌가?" 슈호프가 키르가스를 보며 말했다. "저런 기둥이라면 백 개가 있은들 무슨 상관인가." 키르가스는 히죽 웃었다. "설마 저 기둥에 철조망을 치라고 명령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야." 키르카스는 말을 하면서 농담을 섞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팀원들은 다들 그를 좋아한다.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중에서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만 해도 태양 주변의 기둥이라니 상상이 되질 않았는데 이렇게 직접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생선은 다 익어서 맛있는 냄새가 납니다.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고, 그 위에 돌을 얹어 달군 뒤, 달군 돌에 생선을 얹어 구운, 그야말로 본격 원주민식 요리입니다.

무슨 생선인지 이름도 모르겠는데 별다른 양념도 없이 굽기만 한 이 생선구이가 평생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있는 생선 구이였네요.

바닷물이 묻어서 자연적으로 약간 짭잘하게 간이 되어있는데, 한 입 베어물면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한 식감의 생선살이 가득 씹힙니다. 무슨 스테이크 씹는 것 마냥 맛있는 육즙도 나오고...  

여기에 아침에 챙겼던 빵을 곁들여 먹으니 반찬은 생선 뿐인데도 호화로운 피크닉 분위기가 납니다. 


배도 채웠겠다 슬슬 돌아가는 길에 만난 모아이.

꽤나 외딴 곳에 홀로 쓰러져있는 모아이 석상을 보니, 이런 곳에 세워둔 모아이까지 쫓아와서 쓰러트리는 집념에 감탄하게 됩니다.

이스터섬 원주민인 라파누이들은 폴리네시아 계통에 속하고, 이 사람들이 주로 믿었던 게 바로 요즘 판타지 소설에서 주로 등장하는 '마나'라는 존재죠. 소설에 등장하는 마나는 파란 물약 먹으면 차오르는, 마법을 쓰기 위한 에너지 정도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스터 섬 원주민들은 부족의 흥망성쇠가 바로 이 마나의 원활한 수급과 저장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모아이 석상은 부족의 권위를 자랑할 뿐만 아니라 이 신성한 영혼의 힘을 수집하고 저장하는 수단이었죠.

그러니 부족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먼저 파괴해야 할 대상이 바로 적대 부족의 모아이였습니다. 이런 곳에 세워진 모아이 조차도 스타크래프트 맵 귀퉁이에 숨겨진 적군의 베스핀 가스 정제소 파괴하는 마음가짐으로 때려눕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초원 위에 홀로 우뚝 선 나무. 

왠지 제리 브룩하이머 필름의 로고가 생각나네요.

비 오는 날엔 가까이 가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7인의 모아이, 아후 아키비.

이스터섬의 모든 모아이들은 바다를 등지고 섬 내부, 더 정확히는 마을을 바라보며 마나를 공급해주고 신비로운 힘으로 부족민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아후 아키비의 모아이들만 유일하게 바다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다른 모아이들과는 다르게 일곱 개의 석상이 모두 동일한 크기에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도 특징이지요.


아후 아키비에는 여러가지 설화가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전설은 '위대한 7인의 모험가'의 석상이라는 설입니다.

신관이었던 하우마카가 자신이 모시는 왕인 호투마투아를 위해 새로운 땅을 찾는데, 그 방식이 꿈을 꾸며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눈'으로 세계를 여행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의 중심에 솟아있는 섬을 발견하고, 호투마투아 왕은 일곱 명의 모험가 (혹은 정찰병)을 보내 그 섬을 찾아서 기반을 다지도록 명령합니다. 마침내 이스터섬을 찾아낸 일곱 명의 모험가들은 섬을 개발하며 왕을 기다렸고,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아후 아키비를 세웠다는 이야기지요.

그냥 단순히 바다로 나간 원주민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세웠다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모험가의 석상이라는 게 더 낭만적입니다.  


돌아오는 길, 저 멀리서 말을 타고 마을로 돌아가는 원주민의 모습이 보입니다.

길도 나지 않은 산등성이를 빠른 속도로 타고 내려오는 걸 보니 말을 주요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람들 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작 하루 말을 타 놓고도 왠지 나도 이런 원주민의 삶에 한걸은 더 다가간 것 같아 뿌듯한 기분입니다.

뭐, 관광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렌트카나 사륜구동 바이크에 비하면 조금 더 가까운 건 맞겠지요. 


마을 어귀에 세워진 모아이.

하도 자주 보다보니 이젠 반가운 느낌마저 듭니다.

왠지 집 앞 정원에 세워둔 조각상 보는 느낌이랄까요.


관광업이 주요 산업인 이스터섬 답게 여기저기서 전통 공연도 많이 합니다.

어떤 공연을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숙소 주인이 "다른 곳에서 하는 공연들은 배우들을 사서 하는 거고, 진짜 원주민들이 동네 축제처럼 하는 공연이 있으니 그걸 봐라"라고 추천하길래 관람합니다.

커다란 식당을 전세내서 하는 공연인데,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절반에 현지 주민 관객들이 절반입니다.

초반 공연은 이스터 섬 안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무대. 우리나라로 치면 마치 초등학생들이 부채춤 추거나 태권도 시범 보여주는 느낌입니다. 그야말로 마을 축제 분위기가 물씬 나네요.

 

중간 중간 파라누이들이 어떻게 이 섬에 도착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모아이를 세웠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옵니다.

사실 뭔 소린지 하나도 못알아듣겠지만 음악과 춤만으로도 신이 납니다.


마지막은 관광객이고 주민이고 모두 나가서 댄스 타임.

역시 어느 동네나 축제의 끝은 모두가 어우러진 막춤인 듯 합니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돌아오니 침대 위에서 뽈뽈거리며 기어다니던 조그만 도마뱀이 반겨줍니다.

예전에 캄보디아 갔을 때도 도마뱀을 만났었는데 (http://40075km.tistory.com/28), 이번에도 어떤 행운의 징표 아닐까 하고 기대를 하게 됩니다.

도마뱀하고 노는 것도 잠시, 피곤함에 못 이겨 침대로 쓰러졌지만요.

그런데 막상 누으니 하루 종일 말을 타며 평소에 안 쓰는 근육을 혹사시켜서 그런지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파서 제대로 잠도 못 잘 정도였다는 게 함정. 결국 바로 눕지는 못하고 엎드려서 끙끙거리다 겨우 잠들며 하루를 마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