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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하기:Travel/칠레:Chile

[칠레]이스터섬, 여유롭게 즐기는 바닷가 산책

이스터섬은 그렇게 큰 섬이 아닌데다가 모아이도 처음 볼 때는 신기할 지 몰라도 자꾸 보다 보면 그 놈이 그 놈 같아서 나중에는 심드렁해지기 마련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트래킹 코스를 따라 마을에서부터 화산 분화구까지 걸어가는 데 하루, 라파누이 원주민 안내로 투어를 하는 데 하루, 그리고 자동차나 미니 4륜 바이크를 타고 동남쪽 해안에 몰려있는 주요 모아이 유적들을 보는 데 하루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하루를 더 보태서 휴양지 나온 기분으로 바닷가 산책을 하거나 해수욕장에서 노는 것도 좋지요.

그래서 오늘은 뚜렷한 목표 없이 그냥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안 도로를 따라 어슬렁 어슬렁 산책하는 날입니다.

걷다보면 모아이 말고도 독특하게 생긴 석상들을 자주 만나게 되는데, 볼 때마다 이게 옛날에 세운 조각인지 아니면 요즘들어 새롭게 만든 조각인지 한참동안 고민하게 됩니다.  


도대체 뭘 조각한 걸까요. 사람 얼굴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이정도면 거의 초현실주의나 추상주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걷다 보면 마주치게 되는 커다란 모아이 석상.

원래는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정상인데, 워낙 많이 파손되다보니 모자를 쓰지 않은 모아이가 오히려 더 유명해졌습니다.

모자까지 쓰고 있는 걸 보니 생각하면 할수록 제주도 돌하르방과 비슷한 느낌이네요.


조각공원마냥 석상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는 해변.

워낙 상태가 좋은 조각들이라 조각가들이 따로 조각해서 세워놓은 거겠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윙크하는 조각상.

머리 뒷편으로 큰 구멍이 하나 뚫려있어서 걸어가다보면 왼쪽 눈을 감고 윙크하던 조각상이 어느 새 오른쪽 눈을 감고 윙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마을 공동묘지.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스터 섬에서는 사람이 태어나기도, 죽기도 합니다.

워낙 외떨어진 좁은 섬인데다가 모아이 석상의 신비함에 가려져서 그저 관광지로만 인식되고 있지만, 현지인들에게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지요.


기울어진 전봇대 아래 외롭게 서 있는 조그만 모아이 조각상.

거의 900개에 가까운 오리지널 모아이 석상이 있고, 여기에 예술가들이 새롭게 만들어 세운 모아이 석상들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해안가 구석구석마다 모아이가 없는 곳이 없을 지경입니다.


설렁설렁 걷다 보니 도착한 박물관.

이스터 섬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이나 각종 신화, 라파누이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모아이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섬의 문자는 어떤 것이었는지 등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부분 오리지널 유물이라기보다는 설명을 위한 자료 수준인지라 사진을 찍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입장료도 저렴하니 한 번 둘러볼만한 곳입니다. 


박물관 구경까지 잘 하고 나서 다시 마을로 돌아옵니다. 

다리도 쉴 겸 카페에 앉아 커피 한 잔 시켜먹고 있는데, 자동차가 서더니 사람들이 짐칸에서 갓 잡은 물고기를 가게 안으로 옮기느라 분주합니다.

마침 점심시간도 되었겠다, 방금 잡은 저 물고기가 들어가는 요리를 해 달라고 주문을 했습니다.


생선살과 닭고기, 새우, 버섯, 각종 채소가 듬뿍 들어간 요리가 푸짐하게 나옵니다. 

비스킷처럼 생긴 빵에 살사 소스를 얹어서 곁들여 먹으니 완전 맛있네요.

이스터 섬에 사는 사람들은 관광업 아니면 물고기나 잡고 살겠지..라고 생각하다가 이 요리 한그릇 먹으니 당연히 농부를 비롯한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있겠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타히티에서 넘어와서 그런지 이렇게 푸짐하게 먹고도 그렇게 비싸지 않은 가격에 나름 만족합니다. 그런데 칠레 본토에서 넘어 온 사람들은 갑자기 비싸진 물가에 당황한다고 하더군요.


밥 먹고 다시 산책하는데 마주친 완성품 모아이.

모아이는 이렇게 돌로 만든 제단과 몸통, 모자, 그리고 산호로 만든 눈까지 박혀 있어야 완성품입니다.

하지만 오랜 부족전쟁 끝에 다 파괴되고, 이렇게 온전한 모습의 모아이는 찾아보기 힘들지요.


보통은 이렇게 모자가 날아갔거나, 얼굴이 박살났거나 하는 경우가 태반.

이렇게 훼손된 것은 유럽인들이 상륙한 뒤 미신을 타파한다는 명목으로 박살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라파누이들은 돌을 깨부수는 것 보다는 이렇게 통채로 쓰러트리는 방법을 선호했습니다.

모아이가 많은 동남쪽 해변을 가 보면 줄줄이 누워있는 모아이들이 치열한 세력 다툼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어제 트래킹하면서 봤던 마나바이들도 군데군데 보입니다.

워낙 외진 곳에 있는 마나바이인지라 따로 유적 지정이 된 것 같지는 않은데, 안에 식물이 자라는 걸 보면 현지인이 비닐하우스 대신 활용하고 있는 것인지로 모르겠네요.

 

모아이 뒷편에 새겨진 조인(Bird Man)의 모습.

이스터 섬은 모아이 말고도 조인과 관련된 신화 역시 많은 곳입니다. 고립된 섬이다보니 하늘을 훨훨 날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일까요.

그런데 보통 새와 사람을 섞는다고 하면 사람 몸통에 날개가 달린 모습을 상상하기 마련인데... 이 조각들은 날개보다도 사람 몸에 부리가 달린 얼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고기와 사람을 섞는다고 하면 인어공주만 생각하다가 멀록을 만난 기분이랄까요. 


콧날이 오똑하게 선 게 왠지 차가운 도시남자 분위기를 풍기는 모아이.

비슷하면서도 자세히 보면 다들 얼굴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왠지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각나는 석상도 구경합니다. 원주민의 모습을 조각한 것 같은데, 길게 늘어진 귀가 인상적이네요.

원주민들이 귀가 길게 늘어진 장이족과 귀가 짧은 단이족으로 갈려서 싸우다가 장이족이 승리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여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바닷가를 거닐며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 새 해가 지기 시작합니다.


밝은 달이 모아이 머리 위로 떠오릅니다.

왠지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머리 위에 전구가 켜진 모아이를 보는 느낌. 제목을 붙인다면 '모아이디어'가 될까요?

이놈의 아재개그 본능...-_-;


항구 옆의 조그만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합니다. 해산물 크림 파스타에 맛있는 칠레산 포도주를 곁들여 먹습니다.

칠레 와인은 가성비가 우수한 와인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이유중의 하나로 유럽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순수 유럽 혈통의 포도나무들이 많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1800년대 중반에 유럽에서 발생한 필록세라라는 해충으로 인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포도나무들이 거의 전멸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 와중에 칠레의 포도나무들은 토양 덕분인지 기후 덕분인지 병충해의 피해에서 벗어나 살아남습니다. 칠레의 포도나무들은 1500년대 스페인 정복자들이 옮겨다 심은지라 그야말로 오리지널 와인의 맛을 칠레에서나 찾아볼 수 있게 된 셈이죠. 그래서 란칠레 항공의 와인이 비행기 공짜 와인 중에 제일 맛있다는 말도 심심찮게 돌곤 합니다.

그래봤자 와인은 잘 모르는지라 '붉은 게 레드와인이요, 투명한 건 화이트 와인이구나' 정도만 알아 보는 수준이지만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자 완전히 어두워진 밤하늘이 보입니다.

아까 봤던 모아이 석상에는 나름대로 조명이라고 전등을 비추는데, 이게 막 화려하고 멋있는 느낌이 아니라 왠지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는 호러 영화의 조명 느낌입니다.

무서운 이야기 하면서 손전등을 얼굴 아래서 비추는 느낌이랄까요.

이렇게 무서운 모아이를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합니다. 하루 종일 별로 한 건 없는데, 바닷바람을 워낙 많이 쐬서인지 잡념이나 걱정같은 게 다 날아간 기분.

이제 내일은 라파누이 원주민과 함께 말을 타고 섬 북쪽까지 다녀오는 일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