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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Eat/미국:U.S.A

[미국][미슐랭2스타] 뉴욕 더 모던:The modern in NYC

뉴욕을 대표하는 미술관을 셋 꼽는다면 메트로폴리탄, 구겐하임, 그리고 뉴욕 현대미술관을 들 수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뉴욕 현대미술관 (Museum of Modern Art, 줄여서 Moma)는 실험정신 가득한 현대 미술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친숙한 거장들의 대표작까지 아우르며 많은 관람객들이 즐기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시각이 아닌 미각으로 즐거움을 주는 장소가 있으니, 레스토랑 "더 모던 (The modern)"이 바로 그곳입니다.


맨하탄의 레스토랑답게 식당 간판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안쪽 벽면에 조그맣게 붙어있는 메뉴판이 이곳이 레스토랑임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찾기 힘든 입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것으로 봐서는 역시 입소문(요즘엔 넷소문)이 가장 무섭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016년도에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외에도 여기저기서 많은 상을 받은 곳입니다.


비단 더 모던 뿐만 아니라 미술관 부설 레스토랑들은 다들 나름 훌륭한 퀄리티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지금까지 미술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들러 본 레스토랑에서 크게 실망한 기억은 없네요. 예술이 극에 달하면 다 통한다고, 유명한 음악의 거장들 중에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도 많듯이 미술 애호가들 역시 음식을 통해 자신의 기호를 충족시킵니다. 가족 관람객이나 야외학습 하는 어린이들이 많은 박물관 카페테리아와는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식당 내부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캐쥬얼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바 라운지 구역과 정찬을 주문할 수 있는 다이닝 구역으로 나뉩니다. 듣기로는 메뉴도 살짝 다르고 가격도 좀 차이가 난다고 하더군요.


더 모던은 제임스 비어드 재단의 레스토랑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할 정도로 내부 인테리어도 멋집니다.

하지만 그 인테리어가 빛을 발하는 건 넓은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모마의 조각 공원 덕분이기도 합니다. 

피카소, 미로, 마티스 등의 조각들이 벽걸이 액자를 대신하는 식당은 아마 이 곳 뿐일 겁니다. 

 

어뮤즈 부쉬로 나온 트러플을 곁들인 호박 수프. 수프 보울에 다른 재료들을 담아온 다음 마지막에 웨이터가 손님 앞에서 직접 수프를 부어줍니다. 옆에는 나뭇가지와 허브로 만든 조그마한 둥지에 튀김 종류를 마치 새알처럼 담아서 나왔습니다. 소스를 담은 접시 위에는 그 자리에서 치즈를 갈아 얹어줍니다.

코스 요리를 주문하면 사람마다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코스가 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어뮤즈 부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처음 온 손님이건 단골이건, 가장 저렴한 요리를 주문하건 풀 코스 와인 페어링 서비스를 주문하건, 모든 손님에게 동일하게 서비스되는 가장 첫 코스. 손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는 주방에서 보내오는 따뜻한 환영의 인사. 사람 만남에서 첫인상이 중요하듯, 어뮤즈 부쉬는 그 날의 요리에 대한 전반적인 인상을 심어줍니다.

그리고 더 모던에서 받은 접시 위의 환영 인사는 어뮤즈가 아니라 에피타이저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풍성함을 자랑하며 손님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듬뿍 보여줍니다.  

   

식전빵. 어뮤즈가 워낙 감동적이어서인지 빵은 그냥 평범한 수준으로 느껴집니다.

크로아상과 프렛첼이 버터와 함께 제공됩니다. 메인 코스에 대한 기대가 워낙 높은 관계로 그냥 맛만 보고 패스.


푸아그라 타르트.

아.. 진짜. 말이 안나옵니다.

개인적으로 간 종류는 다 안좋아해서 순대 먹을때도 간 빼고 달라고 할 정도입니다.

당연히 기름진 거위간인 포아그라도 그닥 입맛에 맞는 건 아니고,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소스와 부재료를 잘 써서 만든 경우에나 좀 먹어보는 수준.

그런데 이건 파테(푸아그라를 갈아서 크림 및 향신료와 섞어 굳힌 형태)라서 그런지 차가우면서도 부드럽고, 딱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고소합니다.

여기에 소스와 타르트 빵,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에 올린 새콤한 계열의 베리가 함께 어우러지며 (좀 진부한 표현이지만) 머릿속에서 교향곡 울려퍼지는 느낌입니다.

이거 하나 보고 다시 와도 될 거 같네요.


두번째 코스인 버섯을 곁들인 조개 관자.

맨 위에 올려진 펜넬은 주로 육류나 생선류에 많이 사용되는 허브입니다. 맛이 슬슬 가기 시작하는 고기나 생선도 펜넬을 쓰면 원래의 풍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해서 회향이라고도 부르지요. 그런데 관자와 버섯 요리에도 의외로 잘 어울립니다.

 

오늘의 메인, 새끼돼지 블랑켓(blanquette)입니다. 얇게 썬 콜라비 양배추와 샬롯을 곁들여서 나옵니다.

더 모던은 아메리칸 퀴진을 표방하고는 있는데, 세부적으로 보면 프렌치와 아메리칸의 퓨전 쯤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블랑켓이라는 요리 자체가 프랑스식이거든요. 현대 예술이 대부분 그렇지만, 그림은 화가의 국적보다는 어떤 화풍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의해 그 정체성이 결정됩니다. 더 모던에서 만들어내는 요리도 약간 그런 느낌이랄까요. "우리는 미국 레스토랑이지만 프렌치, 이탈리안 안 가리고 필요한 건 다 재해석해서 활용한다"는 듯한 분위기입니다.

아직 새끼돼지를 먹어 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에 주문했는데 뭐랄까... 좀 미묘하네요.

돼지고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니 고기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부드러우면서도 돼지고기 특유의 맛이 살아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간은 꽤나 짭짤하게 되어 있는데... 이걸 다 종합해보면 왠지 스팸이 떠오르는 맛이 됩니다.

물론 미묘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나지만, 혀가 별로 고급이 아니라 그런지 확 와닿는 건 없네요. 맛이 없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 맛있는 것도 아닌, 애매한 수준입니다.


입가심으로 초컬릿 껍질로 감싼 아이스크림 슈마이가 나옵니다. 차갑게 얼린 조약돌 그릇이 왠지 운치있네요.

커피도 주문해서 마시며 디저트를 기다립니다.

 

추가금을 내면 나오는 디저트 카트. 카트만 보면 선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치즈 카트와 초컬릿 카트가 있는데, 어차피 와인도 안 먹으니 치즈는 패스하고 고민없이 초컬릿 카트로 선택.

이 다양한 달다구리들! 

 

게다가 무려 2층입니다. 마카롱, 쿠키 등은 물론이고 태피나 봉봉도 있습니다.

이것저것 고르면 조그만 접시에 담아서 주고, 더 먹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르기만 하면 다시 카트 끌고 와서 또 접시를 채워줍니다.


에스프레소하고 함께 먹으니 완전 맛있네요. 베이커리를 메인으로 내세우는 가게들에 비할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수준급 과자들입니다.

원래는 7코스 테이스팅 메뉴를 먹어볼까 했는데, 웨이터(나이로 봐서는 홀 매니져인 듯)가 공연 시작 시간을 물어보더니 7코스는 무리고 4코스 정도 먹으면 여유 있게 디저트 먹고 슬슬 걸어갈 수 있을거라고 해서 아쉽지만 4코스 요리로 식사를 마쳤습니다. 다 먹고 나서 슬슬 걸어가니까 공연 시작 10분 전에 딱 극장에 도착했네요. 

미슐랭 별 추가된 걸로 수다도 떨고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지라 팁을 좀 두둑히 줘야 겠구나 각오(?)를 하고 있는데, 놀라운 점은 이곳이 팁을 받지 않는 레스토랑이라는 사실. 

더 모던은 유니온스퀘어 호스피탈리티 그룹 소속의 레스토랑인데, 이 그룹 경영자가 새로 내세운 방침이 따로 팁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손님들의 편의를 위한 건 아니고, 레스토랑 직원들간의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지난 30년간 주방 직원들의 소득은 25% 상승한 반면, 홀 직원들은 200%가 상승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합니다. 손님 입장에서는 어차피 계산서에 포함되는 거니 상관 없지만, 어쨌거나 팁을 몇 퍼센트 줘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는 좀 편한 듯.

코스 전체가 엄청 만족스러운 건 아닌데, 메뉴 한두개가 완전 임팩트가 크네요. 그것만으로도 미슐랭 투스타 받은 게 이해가 됩니다.

다음엔 꼭 풀코스 테이스팅 메뉴를 먹어봐야지...라고 다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