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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Eat/미국:U.S.A

[미국]직접 만든 베이컨을 곁들인 아메리칸 브렉퍼스트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들을 보다 보면 간혹 식욕을 돋구는 음식이 등장하곤 합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부모님이 정신없이 먹다가 돼지로 변하는 음식들이라거나 '벼랑 위의 포뇨'에 등장하는 햄을 얹은 라면 같은 것들 말이죠.

그리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서 하울이 베이컨과 달걀을 굽는 장면 역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침을 꼴딱꼴딱 삼키게 합니다.

물론 "괜히 폼 잡지 말고 두 손으로 달걀 깨란 말이다, 이자식아!"라는 생각도 들긴 합니다만. (자매품으로는 "그냥 평범하게 말 타라, 레골라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시판되는 베이컨들을 보면 종잇장처럼 얇게 썰어서 포장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만화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두툼한 베이컨을 먹으려면 직접 만드는 수 밖에 없지요.

일단 고기 양에 맞춰서 양념을 준비합니다. 저는 고기 1kg당 굵은 소금 1.5스푼과 설탕 1스푼 비율을 사용합니다. 여기에 후추와 월계수잎을 비롯한 각종 허브를 넣고 비밀의 재료 '케미컬X'도 조금 첨가합니다. 고기야 어디서 사건 거의 비슷하기 때문에 염지를 하면서 어떤 재료를 넣느냐가 베이컨의 독특한 맛을 좌우합니다. 잘 팔리는 베이컨집은 이 양념 재료가 기업 비밀이라고도 하죠.

전통의 오리지널 레시피들을 보면 냉장고도 없던 시절, 고기 보존을 위해 만들다보니 소금을 엄청나게 많이 씁니다. 고기 3~4kg에 소금 4컵(!)을 넣는 레시피도 있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 베이컨은 보존보다는 맛으로 먹기 위해 만드는 거니 소금도 적게 넣고, 방부제인 아질산염(핑크솔트)도 제외합니다.


소금+설탕+허브 혼합물을 고기에 골고루 뿌리고 잘 문질러 줍니다. 앞면, 옆면, 뒷면 빠지지 않고 잘 문질러 주는 것이 좋습니다.

베이컨은 돼지 삼겹살로 만들고, 다른 부위로 만들면 햄이 됩니다. 

돼지 삼겹살을 염지 시키고 훈연 과정을 제외하면 판체타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식 염장 고기가 되지요. 

 

베이컨 염지는 크게 건염과 습염으로 나뉘는데, 건염은 이렇게 고기에 곧바로 문질러 버리는 것이고 습염은 양념을 물에 녹여서 염지액을 만든 다음 고기를 담가주는 형태입니다.

각각 나름의 장단점이 있는데, 냉장고에 자리가 넉넉하지 않은 관계로 건염으로 갑니다.

지퍼백에 넣어준 다음, 냉장고에 넣고 하루에 한번씩 뒤집어주면서 일주일에서 열흘 정도 염지시킵니다. 


염지가 끝난 고기는 지나친 소금기를 빼주기 위해 찬물로 깨끗히 닦은 후 물에 담가줍니다. 수시로 물을 버리고 다시 채워주면서 염도를 맞춥니다.

너무 잠깐 담그면 짜서 못먹고, 너무 심하게 헹구면 싱거워지니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고기 상태나 물의 온도에 따라 소금기 빠지는 정도가 다른 관계로 이렇게 귀퉁이를 조금 잘라 구워먹으면서 맛을 보는 게 좋습니다.

맥주 한 캔 옆에 끼고 맛을 보면 더 좋습니다. 그러다가 잘못하면 맛을 본다는 핑계로 한 덩어리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만... 

 

염도가 맞으면 키친타올로 물기를 제거한 후, 서늘하고 건조한 곳에 하룻동안 보관합니다. 서늘하고 건조한 곳을 따로 찾기가 힘들면 그냥 마음 편하게 냉장고에 넣어둬도 좋습니다.

이렇게 건조시켜야 연기가 더 잘 스며든다고 하네요.

 

준비가 끝나면 대망의 훈연 시간입니다. 사과나무칩을 써서 훈제에 들어갑니다.

훈제에서 가장 중요한 양념은 연기인 만큼, 어떤 나무를 쓰느냐에 따라 베이컨의 맛이 크게 달라집니다.

당연하지만 사과나무를 쓴다고 사과 냄새가 나거나, 벛나무를 쓴다고 벛꽃 냄새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각 나무가 갖는 특유의 연기 냄새가 있는데, 사과나무는 그 중에서도 가장 인기많고 흔한 연기 냄새가 납니다. 마트에서 파는 베이컨에서 나는 냄새는 거의 십중팔구 사과나무 훈연목 냄새라고 보면 될 듯. 


예전에는 베이컨 훈제한다고 나무토막을 물에 불리고 숯을 계속 태워주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나무칩과 훈연박스를 준비해서 훨씬 간편하게 훈제를 할 수 있습니다.

위아래로 구멍 뽕뽕 뚫린 박스에 사과나무 칩을 넣고 토치로 확 구워버리면 끝. 박스 뚜껑을 덮고 그 위에 고기를 올린 다음 그릴 덮개를 덮어주면 기다리는 일만 남습니다.

숯을 쓸때는 불 붙는 건 아닌지, 연기 꺼지는 건 아닌지 계속 신경써야 했는데 말이죠.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기다립니다.

내부 온도는 50도 이하를 유지해야 하는데, 스모킹 박스를 쓰는데다가 겨울이라 날이 추운 관계로 굳이 온도계를 꽂을 필요도 없이 저온 유지가 됩니다. 이게 온도가 높아지면 육즙이 막 흐르면서 베이컨이 아니라 바베큐가 되어버리죠.

본격적으로 훈제하는 베이컨 장인들은 며칠씩 훈제시키기도 한다고 하는데, 아마추어답게 그냥 4시간만 훈연합니다.


이전에 살던 집은 거실과 연결되는 뒷마당이 있어서 불 피워놓고 집 안에서 따뜻하게 기다렸는데, 새로 온 집은 그릴 쓸만한 곳이 주택단지 뒷편의 공용 바베큐 공간 뿐인지라 계속 지켜봐야 합니다.

겨울 날씨가 추운 관계로 '그냥 두고 차에 들어가 있을까...'라고 생각하는데, 저 멀리 길고양이가 이쪽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자리를 비웠다가는 곧바로 달려와서 뚜껑 열고 다 먹어치울 기세인지라 자리를 뜨지도 못하고 고양이와 눈싸움만 합니다.

그런데 길냥이 골목대장인지, 인상이 아주 험상궂은게 그냥 와서 "베이컨 내놔"하고 삥 뜯어도 곱게 갖다바쳐야 할 분위기네요.


고양이가 주는 압박을 견뎌내며 훈연을 끝내면 그대로 집에 가져와서 오븐에 넣고 쿠킹작업에 들어갑니다.

100도 오븐에 넣고 30분 정도 짧게 조리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기생충을 죽이고 육즙이 골고루 베어들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고기 심부 온도는 65도가 가장 적장합니다. 70도가 넘으면 바베큐가 되어버리고, 너무 낮으면 미생물이 번식하거나 육즙이 제대로 안 나올 수가 있습니다.

 

쿠킹까지 끝낸 삼겹살. 

구운 돼지고기의 냄새가 연기 냄새와 어우러지며 식욕을 돋굽니다. 

날씨가 추워서 훈제하면서 고기를 안 뒤집어 줬더니 철망 자국이 생겼습니다. -_-; 다음에는 좀 자주 뒤집어 줘야 할 듯.


지금 당장 구워서 집어먹고 싶지만 꾹 참고, 호일에 싸서 냉장고에 넣고 다시 하루 숙성시킵니다.

연기와 육즙이 베이컨 전체에 골고루 퍼지게 하는 과정입니다.


냉장고에서 하루 숙성하고 나온 베이컨.

꺼내는 순간 베이컨 특유의 스모키한 향이 계속 따라옵니다. 

방부제를 사용하지 않은 관계로 먹을 것만 썰어서 냉장실에 넣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보관합니다.

코스트코에서 고기를 사는 바람에 잘라놓은 삼겹살을 샀는데, 다음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르지 않은 통 삼겹살을 사야지..라고 다짐합니다. 얇게 썰어내는 게 너무 힘드네요.

아니면... 고기 자르는 기계를 하나 질러야 하나...


직접 만든 베이컨과 달걀을 굽다보니 욕심이 생겨서 아예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차렸습니다.

베이컨과 달걀, 씨리얼, 식빵, 버터와 잼, 커피, 오렌지 쥬스, 과일로 구성됩니다.

여기서 차림새를 줄이고 차가운 고기류와 빵 중심으로 가면 컨티넨탈 브렉퍼스트, 갖가지 고기 요리와 해쉬 브라운 및 콩 요리가 추가되면 잉글리쉬 브렉퍼스트가 됩니다. 원래 영국식 아침식사가 굉장히 거하게 먹는게 특징이라더군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애프터눈 티 셋트도 요란하기는 마찬가지이니... 그냥 하루 종일 많이 먹는다고 보면 될지도.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시판되는 베이컨보다 훨씬 맛있습니다. 꽤나 두툼하게 썰어서 그런지 겉은 바삭바삭하면서도 가운데는 부드러운 부분이 남아있는 베이컨 요리가 가능합니다. 달걀, 토스트와 함께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왔던 것처럼 후루룹 짭짭 먹어줍니다.

접시에 묻은 베이컨 기름까지 토스트 껍질로 싹싹 훑어먹고 뒤로 물러나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고 있노라면 포만감과 함께 만족스러운 기분이 드는게 왠지 보람찬 하루를 끝마친 기분입니다. 실제로는 저녁 식사가 아니라 아침 식사를 끝낸 건데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