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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기:Eat/한국:Korea

[한국]채식주의자들의 피난처, 오세계향


단순히 채소를 좋아하고 많이 먹는 것을 넘어 채식'주의'라는 말이 붙으면 상당히 복잡한 실체와 마주치게 됩니다.

희생되는 동물들의 생존권을 위해서인가, 에너지소모가 덜한 식물 재배를 통해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인가, 카르마 (업보)를 쌓지 않기 위함인가, 그도 아니면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인가...


이에 따라 채식주의자도 다양하게 종류가 갈립니다. 오로지 식물만 먹는 비건, 우유 정도는 허용하는 락토, 우유에 달걀까지는 먹어주는 락토-오보, (아직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생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니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페스코. 공장식으로 대량 생산한 육류만 반대하는 플렉시테리안도 있네요. 


하지만 채식주의자라고 해서 고기'맛'을 싫어하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더 다양한 음식, 더 맛있는 음식을 추구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본능이니까요. 그러다보니 식물을 이용해서 고기를 흉내내는 요리도 나오곤 합니다. 단백질이 풍부한 콩을 이용한 고기 요리가 대표적이죠.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이 마음 편히 고기맛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바로 인사동에 위치한 채식 전문 식당, '오세계향'입니다.




오세계향에서 먹은 냉면. 배 밑에는 고기도 한 점 깔려있습니다. 그 탓에 처음에는 이곳이 채식주의자 식당이라는 사실도 몰랐을 정도.


대부분의 콩고기는 맛은 그럭저럭 흉내내도 고기의 식감을 재현할 수 없어서 단번에 눈치채곤 하는데, 이 고기는 어떻게 만들었는지 상당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차이를 느끼기 힘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랐던 건 육수. 제대로 만든 냉면 육수라면 고깃국물 우려내서 만들어야 제맛인데, 여기는 채소만으로 어떻게 이런 국물을 낸 건지 신기할 지경입니다.




나중에 채식 전문점이라는 걸 알고 나서 재방문. 이번엔 무려 '돈까스'를 주문해 봤습니다. 정식 명칭은 콩까스. 

샐러드, 스프, 콩 소세지, 밥 등이 함께 나옵니다.




콩까스의 단면. 콩으로 만든 고기의 최대 약점인 식감을 튀김으로 커버하니 맛은 일반적인 돈까스와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입니다.


물론 두툼한 고기에 튀김옷을 입혀 튀겨낸 돈까스 수준은 아니고, 그냥 일반 식당의 얇은 돈까스 수준입니다만, 그래도 콩으로 이정도까지 고기의 맛을 따라간다는 점은 놀랍습니다. 


사실 이러한 채식주의자들의 고기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요리의 역사는 꽤나 오래되었습니다. 불교가 전파되면서 중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크게 호황을 누린 정진요리에도 가짜 고기가 자주 등장하니까요. 두부껍질로 만든 햄, 곤약으로 만든 오징어, 버섯으로 만든 전복 등이 유명하지요. 뭐, 이쯤 되면 어지간한 고기 요리보다도 훨씬 더 정성이 들어가야 하지만요.




채식불구이덮밥. 볶은 양배추와 당근 사이로 불고기가 보입니다. 콩으로 만들었지만 불고기 양념과 더불어 부드러운 고기를 먹는 느낌이 납니다. 생고기를 숯불구이로 구워먹는 게 아닌 이상, 양념에 재워놓는 불고기나 기름에 튀기는 돈까스 같은 고기 요리는 콩고기를 사용해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네요.


물론 전반적으로 보면 고기 요리를 진짜 맛있게 하는 식당 수준으로 보기는 힘듭니다. 아무리 수를 써도 고기 본연의 식감과 풍미라는 게 있으니까요. 만약 콩고기가 소고기나 돼지고기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맛과 식감을 낼 수 있다면 대형마트 정육코너에 이미 크게 한자리 차지하고 있겠죠. 


하지만 가짜 고기 요리를 경험해 본다는 점에서, 혹은 일행 중 채식주의자가 있는 경우, 아니면 소화 잘 되는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고기가 땡길 경우 괜찮은 선택이 될 듯 합니다. 실제로 식당 내부는 채식주의자 외국인 관광객이나 종교상의 이유로 고기를 못 먹는 힌두교, 이슬람교도 많이 보이더라구요.




그렇다고 가짜 고기 메뉴만 있는 건 아닙니다. 우엉들깨탕처럼 겉으로나 속으로나 고기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메뉴도 존재합니다. 고소하고 걸쭉한 들깨탕 속에서 가끔씩 보이는 우엉이 씹히는 식감의 아쉬움을 달래줍니다. 


심리적 부담감이나 트라우마로 인해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라면 가짜 고기에도 거부감을 느낄 테니 이런 음식 메뉴는 당연한 옵션입니다. 어린 시절 시골집에서 목 잘린 채 뛰어다니는 닭을 봤다던가, 애완동물이 차에 치여 죽는 모습을 봤다던가 하는 다양한 계기로 고기 자체에 거부감을 갖게 된 사람들이 의외로 많더군요. 맨부커상 수상으로 유명해진 한강 작가의 소설,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도 이런 트라우마로 인해 고기를 기피하게 되죠.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오토바이의 시동이 걸리고, 아버지는 달리기 시작해.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축 늘어진 몸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 한강, "채식주의자" 중에서 


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만 않으면 대다수의 불편한 진실을 외면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고기 반대하는 프랑스인은 고통받는 거위를 외면하고, 푸아그라 반대하는 한국인은 고통받는 반반무많이 치킨들을 외면하고, 삼겹살을 구워먹으며 어린 나이에 거세당하고 죽는 돼지들을 외면하고, 생선회를 즐기며 활어횟집 수족관에서 인구(어구?)과밀로 숨도 못쉬는 생선들을 외면하고... 뭐, 그렇게 다들 먹고 사는 거죠. 


개인적으로는 사람의 삶이라는 게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라, 그냥 뻔뻔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다른 생명체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인간종의 숙명이랄까요. 사람 잡아먹던 사자나 호랑이들이 채식주의자 연합에 가입하지 않듯이, 인간도 '인간적'으로 사는 거죠. 다만, 언젠가 사람 뇌를 빼먹는 외계인들이 비행접시를 타고 나타난다면 각오는 해야겠지만요.